속도를 늦추니 되살아나는 감각들

[4일 차] 푸엔테 라 레이나 > 에스테야

by Zorba

[Day 4] Puente La Reina > Estella


전날 홀로 띄운 생각들은 다행히 밤하늘을 타고 아침 햇살이 되어 내려왔다. 누군가를 쫓아가는 것이 아닌 나만의 길을 걷기로 한 오늘, 어제 같이 걷던 동행들을 먼저 보내고 홀로 터벅터벅 느린 걸음으로 알베르게를 나왔다. 노란색 화살표를 따라 걷다 보니 로마네스크 양식의 커다란 돌다리를 마주했다. 다리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어제 하룻밤을 묵었던 마을인 푸엔테 라 레이나, 직역하자면 '여왕의 다리'였다. 이 다리를 건넌다는 것은 이 마을을 떠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졌고, 그렇게 나는 푸엔테 라 레이나라는 이름을 뒤로한 채 또 다른 하루의 걸음을 옮겼다.


그동안 앞만 보고 걷느라 많은 것을 놓친 것 같아, 오늘은 여유를 갖고 길 자체를 온전히 즐기기로 했다. 성당 입구에서 옹기종기 모여있는 고양이 가족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잠시 쪼그려 앉기도 하고, 저 멀리서 날아오는 새떼들이 반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한다. 길에 놓인 모래자갈들을 괜히 발로 건드려보기도 하고, 앙상한 민들레 줄기에 붙어있는 달팽이를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쓰다듬기도 한다. 주변에 살아있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던 중,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친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 스페인 아주머니가 본인 손에 들려있는 풀을 나에게 내민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나는 자연스레 아주머니의 손으로 코를 갖다 대고, 이내 향긋한 허브향이 올라온다. 오랜만에 맡는 자연 그 자체의 냄새다. 웃는 얼굴로 화답을 하니, 아주머니가 곳곳에 다른 풀들을 소개해준다. 각기 다른 향이 코끝을 찌른다. 생각해 보니 한국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비염 때문에 냄새를 잘 맡을 수 없었는데, 어느새 자연과 하나 되어 정상으로 돌아온 코를 보니 온전한 후각이 주는 기쁨을 오랜만에 되찾은 것 같다. 동시에 모든 풀의 이름을 외우고 다니는 스페인 아주머니를 보니 괜히 식물을 키우시는 어머니가 떠오르기도 한다. 예전에는 꽃이 참 실용성 없는 선물이라고 느꼈는데, 갑자기 어머니께 꽃 한 다발 선물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나이가 들었나 보다.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고, 냄새를 맡으며 세상과 비로소 온전한 소통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길의 온전한 모습을 받아들이게 되며, 이윽고 내가 경험하는 이 모든 것들에 감사하게 된다. 이제야 비로소 여유롭게 걷는 법을 배운 듯하다. 길의 공기가 달라진 기분이다.


저기 앞에 한 스페인 아저씨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아주머니는 나에게 '부엔 까미노'라는 말과 함께 아저씨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윽고 허브를 쥔 손을 아저씨 코끝으로 가져가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아저씨의 비어있는 손을 잡는다. 큰 배낭을 짊어지고 함께 걸어가는 부부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내가 기대하는 미래의 결혼생활을 그려본다. 그들을 통해 어떤 사람과 남은 인생을 함께 살아가면 좋을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있는 사람. 어려움을 함께 이겨낼 수 있는 사람. 소비로 욕구를 채우지 않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한국인을 만났다. 대구에서 온 동생이었는데, 전역 후에 유럽 여행 중이라고 했다. 순례길에 큰 의미를 둔 개신교 신자였으며, 동시에 문학을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아직 대학생이었던 동생에게 졸업 후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물어보았다.


"전 외교관이 되고 싶어요."

순간 소름이 돋았다. 6년 전 학교에 복학했을 때 나의 꿈과 정확히 같았기에, 지난날 나의 모습을 보고 있는 듯했다. 물론 그 꿈은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당시에는 공부가 지겨웠고 빨리 돈을 벌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니면 외무고시라는 시험에 지레 겁먹었던 걸지도 모른다. 아마 외교관이라는 직업 자체에 확신이 없었던 것이 가장 정확한 이유가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어느 정도 사회생활을 한 지금 그 시절의 꿈을 다시 회상해 보니 왠지 모를 미련이 남는다. 그때 외무고시를 열심히 공부해서 외교관이 되었다면 그 삶은 어떨까에 대한 상상을 해본다. '지금보다 나았을까?'


애석하게도 인생은 단 한 번뿐이기에 내가 선택하지 않은 길을 같은 시간 속에서 경험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길이 옳다고 믿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때 나의 선택을 후회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던 것 같다. 하지만 오늘 과거의 선택에 미련을 갖는 나를 보며 예전과 많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물론 그렇다고 내 선택을 돌이킬 순 없다. 앞으로만 가는 시간 앞에서는 새로운 선택들만이 기다릴 뿐이다. 오늘과 같은 미련을 최대한 덜어내기 위해선 보다 '좋은' 선택을 해야만 한다. 그 선택에 과연 정답이 있을까? 없다고 본다. 다만 내가 살아오면서 경험한 오답은 있다. 그 오답을 명확히 인지하고 하나씩 지워가다 보면 나는 최소한 '나쁜' 선택은 안 하지 않을까 싶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대구 동생이 물었다.

"형님은 나중에 죽으면 묘비명에 어떤 문구를 새기고 싶으세요?"


크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다만 그 순간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 '그리스인 조르바'의 저자인 니콜로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이 생각났다. 아마 이렇게 살 수만 있다면, 비슷한 느낌의 묘비명을 짓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마을 입구 식수대부터 별의 문양이 보인다. 스페인어로 '별'을 뜻하는 에스테야에 도착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세상 누구보다 여유롭게 걸었는데도 4시쯤 도착한 것을 보니, 역시나 빨리 걷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마침 주방이 있는 알베르게에 묵게 되어 대구 동생이 요리를 해 먹자고 제안을 했다. 순례길 처음으로 스페인 마트에 들러 식재료를 샀다. 사실 나는 요리를 잘하지 못하기에, 전적으로 동생에게 맡기고 요리 외의 모든 것을 충실히 수행했다. 맨날 식당에서 먹다가 처음으로 직접 만든 요리를 먹었다. 맛도 맛이지만 요리를 만든 이의 마음까지 전해지는 다소 특별한 저녁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대접한다는 것의 기쁨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소소하게나마 하고 싶은 게 생겼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서늘한 바람이 부는 야외 테이블로 향했다. 짧은 머리의 외국인이 마침 담배를 피우고 있길래 옆에 앉아 자연스레 말을 걸었다. 21살의 퀘벡에서 온 빅터라는 군인이었다. 출신을 물으니 캐나다가 아닌 퀘벡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첫째 날 만났던 바스크 지방 아저씨 필리오가 생각난다. 빅터는 군인 집안에서 태어나서 그 일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친구였다. 그리고 캐나다는 군인에 대한 대우가 좋아서 이 일을 하는 것 자체가 경제적으로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알려주었다.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 전역 출신으로써 군대 얘기는 참을 수 없었다. 나 역시 군복무 시절을 얘기하며 우리는 '군인'이라는 공통 관심사로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러던 중 빅터가 물었다.

"통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대한민국 국민 각자가 생각하는 게 다르겠지만, 그리고 모든 의견은 존중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으로는 통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했다. 다소 정치적인 이야기는 온전히 배제하고, 통일은 우리나라의 무너져가는 경제성장률을 장기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물론 동해안의 석유와 가스전 탐사 개발이 원활히 이루어져 우리나라도 산유국이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말이다.) 경제학적으로 국가의 장기성장률은 토지, 노동, 자본 등의 생산 요소를 활용하는 효율성에 좌우되는데, 이미 고착화된 저출산에서 오는 노동과 사실상 섬과 다름없는 반도에서 오는 토지의 명확한 한계점을 해결시킬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 생각했다.


한껏 이야기를 나누고 알베르게의 2층 침대로 올라간다. 다행히 난간이 붙어있는 침대다. 며칠간 난간이 없는 2층에서 자느라 잠이 들기 직전까지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지만, 오늘은 다행히 편안하게 잘 수 있을 듯하다.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 이래로 가장 여유로운 하루였다. 이제야 이 길을 온전히 즐기는 것 같다. 속도를 늦추니 보지 못했던 풍경이 보이고, 듣지 못했던 소리가 들리고, 맡지 못했던 냄새를 맡고, 먹지 못했던 음식을 먹고, 느끼지 못했던 수많은 것들을 느끼게 되었다. 이번 순례길만큼은 조급함을 잠시 내려놓아야겠다. 세상은 내가 여유로울 때 비로소 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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