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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승한 Dec 11. 2020

이십만 원

삶과 돈

  연말의 밤거리에는 불빛들만 을씨년스러웠다. 간판이 내는 불빛, 가로등이 내는 불빛, 차들이 내는 불빛들 속에서 사람만 없었다. 간판의 조명을 켜고 끄는 일, 가로등이 제시간에 켜지고 꺼지도록 살피는 일, 차를 모는 일은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인데, 그중 어느 것에서도 사람이 사는 일이 관찰되지 않았다. 사위에 나뿐인 거리에서, 목적은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무작정 나서서 몇 시간이고 발길 닿는 대로 걸었던 내 젊은 날 밤의 기억이 다시금 살아나서, 결국은 내 삶이라는 것이 그날 밤을 잡아 늘놓은 것일 뿐일 것이라 자조했다. 지나온 내 삶에 아무 일도 없었고, 남은 내 삶에도 마찬가지로 아무 일도 없을 테지만, 무참하게도 나에게는 돌아가야 할 곳, 다시 살아내야 할 하루가 있었다. 시간은 흐르고, 내 삶은 지속될 텐데, 그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일들을 반복하며 끝내 아무것도 아니기 위해 살고 있구나. 그 지독함에 질려서 목적지를 떠올렸고, 별 수 없이 택시를 잡아 탔다.


  차가운 연말의 밤거리 위에서 만난 택시 기사는 따뜻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목소리가 참 좋으세요. 그런 말씀 많이 들으시죠. 아하하, 그럼요. 감사합니다. 내 말의 공허함에 내가 아연해 있는 동안, 그는 너스레를 떨고, 행선지를 확인하고,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모시겠다고 하는 서비스 멘트도 잊지 않았다. 바이러스 때문에 수상한 시절이라, 대화 거리를 찾았다. 요즘 많이 힘드시죠. 짧은 침묵이라도 있었다면 더 말을 걸지 않았을 텐데,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밤 열 시만 되면 길에 사람이 없어요. 아주 죽겠습니다. 나의 말은 그의 처지를 짐작하는 말, 혹은 공감하는 말처럼 들렸을 텐데, 사실 나는 둘 중 어느 것도 의도하지 못했다. 빈 껍데기 같은 말에, 그는 진심으로 화답했다. 나는 생각했다. 말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구나. 나도 어쩌면 말로 누군가를 죽였거나, 죽이고 있거나, 죽일지도 모르겠구나. 혹은 내가 끝내 말에 죽고 말겠구나. 차는 시간처럼 계속 달렸다.


  - 그저께 베트남 사람 둘을 태웠는데, 천안까지 10만 원에 가자는 거예요. 못 간다고 했더니 욕을 하면서 내리더라고요. 아니, 생각해보세요. 밤 열두 시에, 왕복 기름값에, 시외 할증에 톨비만 해도 10만 원은 훌쩍 넘는데, 20에 하자 그랬더니 나한테 욕을 하더라고요. 미터기 켜고 가도 그것보단 많이 나온단 말이죠. 참, 지은 죄도 없이 찝찝하고, 화도 나고. 그럴 때마다 그만둬야지, 그만둬야지 하다가도 그냥 시간만 되면 나오는 거죠. 별 수 없이.


  별 수 없이. 나는 밤 열두 시에 서울에서 택시를 타고 천안으로 가는 두 명의 베트남인을 생각했는데, 그들의 모습과 사연을 짐작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서울에서 출발해 천안에 그들을 내려주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그의 모습도 상상할 수 없었다. 다른 이의 삶이란 그토록 아득한 것이다, 별 수 없이.


  얼마 뒤 있을 친구의 결혼식을 떠올렸다. 20만 원과 간단히 쓴 쪽지로 내 축의를 전달할 생각이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내 축의의 적정가였다. 표시하고 나서 여한이 없는, 다시 돌려받지 못하더라도 아깝지 않은 적절한 선. 이유는 알 수 없다. 20만 원은 그가 밤 열두 시에 베트남인 두 명을 태우고, 서울에서 출발해 천안에서 내려주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대가로 받을 금액이었다. 누군가는 그 돈을 내고 천안으로 갈 수 없어 난생처음 본 사람에게 욕을 하는데, 친구들을 만나 술 한 잔 사면 사라지는 그 돈의 가치는 도대체 어떻게 매겨지는 것인지, 도대체 인간은 그런 돈의 들쭉날쭉함을 어떻게 버티며 사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20만 원이라는 돈은 헛되이 벌리고 헛되이 쓰이는, 그런 헛것이겠구나. 든 자리와 난 자리에 표시조차 나지 않는, 딱 우리 삶 같은 것이 돈이다.


  택시비는 2만 4천 원이 나왔다. 법인카드로 결제를 했다. 법인 카드로는 택시를 얼마나 더 탈 수 있을 것인가. 20만 원뿐이라면 앞으로 7번 남았나, 따위의 생각을 했다. 택시에서 내리며 말했다. 덕분에 편안하게 왔습니다. 차 문이 닫히기 전에 그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조심해서 들어가라니. 집 바로 앞에서, 나는 그 말과 20만 원의 무게를 생각했고, 생각보다 집으로 들어가는 일은 조심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20만 원을 생각하며, 동터오는 새벽에 이리저리 뒤척였다.




2020.12.11.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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