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희수 Sep 23. 2020

야채 코너를 서성이는 마음

   마트에 갈 때마다 차량용품 코너를 살피는 사람이 있듯, 나는 매번 야채 코너를 살핀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이봐요, 그건 당신이 차가 없어서 그래요’라고 따져올지도 모르겠다. 옳은 지적이다. 만약 차가 생기면 나도 차량용품 코너를 기웃거리게 될지 모른다. 하나 그렇더라도 야채 코너에 머무는 시간이 줄거나 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애당초 차가 있고 없고 와 야채를 즐겨먹는 것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성도 없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그냥 나는 기기나 부품 구경보다는 싱싱한 야채들을 구경하는 쪽을 선호한다는 얘기다.

   야채를 볼 때마다 언제나 ‘참 예쁘다’고 생각한다. 물론 외양만 따지면 과일 쪽이 훨씬 더 예쁘고 화사하다. 다만 과일 쪽은 너무 하나같이 예뻐서 발견하는 재미가 덜하다고 할까. 표정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반면 야채는 과일만큼 화사하진 않아도 유심히 보면 제각기 뚜렷한 표정과 성격을 갖고있다. 최근 좋지 않은 일이 있었는지 어딘지 모르게 표정이 어두운 녀석이 있는가 하면, 날아갈 듯 싱글벙글 웃고 있는 녀석도 있고, ‘뭐든 다 좋아’ 주의인 녀석, ‘아 몰라, 나 건드리지 마’ 주의인 녀석도 있다. 어떤 야채에는 왠지 그냥 마음이 가고, 어떤 야채는 이상하게 마음이 가지 않는다. 또는 예전에는 영 별로라고 생각한 야채가 갑자기 좋아지는 일도 가끔은 생긴다. 그런 걸 보면 야채도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또 하나, 야채 코너를 대충대충 살필 수 없는 중요한 이유는, 웬만해서는 가격에 변동이 생기지 않는 공산품과 달리, 야채는 거의 매일 가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는 냉장고 야채칸에 양배추를 항상 구비해두는 편인데, 얼마 전부터 가격이 너무 치솟아서 최근에는 구경도 못하고 있다. 뭐, 대신 다른 합리적인 가격의 야채를 사 먹고는 있지만, 이 ‘양배추 고픔 상태’를 언제까지 견딜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요컨대 주식이나 IT업계 정황을 예의 주시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듯, 나는 야채계 정황을 예의 주시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아무튼, 그처럼 마트에 갈 때마다 야채 코너를 어슬렁거리다 보면, 이따금 못 보던 야채를 발견할 때도 있다. 몇 달 전에는 ‘아삭채’라는 처음 보는 야채가 진열되어 있는 걸 보고는 냉큼 집어 들었다. 라벨을 읽어보니 생으로 먹어도 좋다고 쓰여있어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조금 뜯어내 먹어봤는데, 어라. 달착지근하고 이름처럼 아삭한 것이 분명 어디선가 먹어본 맛과 식감이었다. 검색해봤더니 ‘아삭채’는 이름만 다를 뿐 과거 일본 여행에서 감동하며 먹었던 ‘미즈나’와 같은 야채였다. 드디어 우리나라에서도 본격적으로 미즈나 재배가 시작된 것이다! 이제 집에서도 매일 미즈나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나는 무척 기뻤다. 꾸준히 야채 코너를 살핀 보람이 있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와 아삭채의 연은 얼마 가지 못했다. 첫 만남 이후 마트에 들를 때마다 어김없이 아삭채를 구입했지만, 진열 칸의 행색과 야채 상태로 볼 때 아무래도 이 지역에서 그걸 얼씨구나 하고 사 먹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삭채는 첫 등장 후 몇 주 뒤에 야채 코너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가슴이 아팠다.

   그리하여 아삭채 없는 맹숭맹숭한 나날이 이어졌다. 한 번은 차오르는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고 담당 직원에게 ‘저기, 이쯤에 아삭채라는 게 있었는데, 그건 언제 또 들어오나요?’라고 문의해보기도 했으나, ‘그건 이제 없다’거나 ‘그건 자주 안 들어온다’는 쓸쓸한 대답만 돌아왔다. 그때부터 나는 야채 코너에 들르면 일단 아삭채부터 찾고 보는 습관이 들어버렸다. 하지만 슬프게도 아직까지는 소식이 없는 상황이다. (혹시 아삭채가 이 글을 보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을 테니….)

   뭐, 그건 그렇고. 이건 처음 봤을 때부터 든 생각인데, ‘아삭채’라는 이름은 너무 성의 없어 보인다고 할까, 다소 몰개성하지 않나. 아무리 한일 관계가 좋지 않다 해도 애초에 교토가 원산지인 야채인데 원래 이름을 쓰거나, 좀 개성 있는 이름을 붙이는 편이 더 좋지 않았을까. 괜한 참견인 것 같지만.


   그렇게 매번 쓸쓸한 마음을 추스르며 야채 코너를 서성이다 새로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공심채’였다. ‘공심채’는 동남아 국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시금치 과의 열대 잎채소인데, 흔히 ‘모닝글로리’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빌 공(空)에 마음 심(心)… ‘텅 빈 마음의 야채’라니. 아삭채와는 달리 문학적 정취마저 느껴지는 심오한 이름 아닌가. 그 석자를 보자마자 나는 청승맞게도 ‘그랬구나, 너도 마음이 텅 비어버렸구나’하며 가장 싱싱해 보이는 녀석을 골라 장바구니에 담았다. 마치 그걸 먹으면 마음이 다시 채워질 거라고 믿는 사람처럼.

   한데 나중에 요리를 하기 위해 손질을 하고 보니, 공심채는 마치 빨대처럼 줄기 속이 텅 비어있었다. 그렇구나. 줄기 속이 비어서 ‘공심’이었던 거구나. 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텅 빈 마음을 유린당한 것만 같은 비참한 기분도 들었다. 그러나 막상 요리해 먹고 보니 너무도 맛있어서 그런 마음도 금세 싹 가셨다. 정말로 공심채에는 마음을 채우는 효능이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공심채뿐 아니라 모든 야채들에도 마음이 있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오늘도 나는 야채 코너를 서성이며 그들의 표정을 살피고 대화를 나눈다. 마음을 나눈다.








매거진의 이전글 큰 냄비 야채스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