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릉비를 모르시는 분들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광활한 만주 벌판을 호령했던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의 무덤에 세워진 비이죠. 이 비는 오늘날 한국인의 자존심인 전성기의 고구려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 정부가 통제를 가할 정도로 지안에 광개토대왕릉비를 보기 위해 찾고 있고 국내에선 구리시에서는 세워진 광개토대왕릉비의 복제비를 비롯해 7개 이상의 복제비가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끈 광개토대왕을 상징합니다.
2004년에는 DC인사이드의 한 네티즌이 광개토대왕을 모델로 한 10만 원 화폐를 합성했을 때 광개토대왕릉비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출처 : 오마이뉴스)
이 비는 문헌 자료가 부족한 고구려 역사를 보충하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거대한 비답게 담고 있는 글자 수도 1775자나 되고 고구려 초기 역사, 광개토왕의 업적, 왕릉 관리 실태 등 내용도 다채롭습니다. 또 비 모양을 근거로 신라의 울진봉평비와 닮아 있어 고구려 문화가 신라로 전해지는 문화의 흐름이라던지 백잔이란 용어에서 볼 수 있는 고구려의 대외관, 추모나 홀본 등에서 알 수 있는 고구려인의 고유어 한자 표기방식 등을 알 수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좌)와 울진봉평비(우). 모양이 닮아 있다.(출처 : 한민족대백과사전, 대구일보)
광개토대왕릉비는 이렇게 많은 정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내용은 신묘년조 기사입니다. 신묘년조는 391년에 있었던 광개토대왕의 군사활동을 기록한 것인데 기록 자체는 32자로 비문 글자 수의 1.8퍼센트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이유는 그 내용이 한국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죠.
백잔(백제를 낮추어 부르는 말)과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이라 고구려에 조공하였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건너와 백잔을 공파하고 …신라 … 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이에 [영락(永樂)] 6년(396) 병신(丙申)에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백]잔국(百殘國)을 토벌하였다.
- 광개토대왕릉비 신묘년조(번역 출처 : 우리역사넷)
간단히 말해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 신라를 점령하고 고구려와 왜가 패권 전쟁을 벌였다는 겁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기엔 왜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문화를 전해줄 정도로 문화적 후진국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고구려인들의 당대 목소리로 강력한 왜를 설명하고 있으니 당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반면 일본인들에겐 매우 쾌재를 부를만한 내용이었죠. 100여 년 전 조선을 강제 병합해 중국 대륙으로 침략하려는 일본에겐 신묘년조가 역사적 명분을 제공해줬습니다. 일본식민사학자들이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이나 임나일본부 기록, 삼국의 일본에 대한 조공기사 등과 함께 신묘년조 기사를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남선경영론으로 해석하는 근거로 활용하기도 하게 됩니다. 고대부터 일본은 조선보다 우위에 있으니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고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라는 식으로 말이죠.
이러니 일제 강점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신묘년조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게 됩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적 자긍심을 회복하는 일종의 독립운동의 일환으로서, 오늘날에는 식민사학의 영향력을 일소하여 주체적인 관점으로 우리 역사를 돌아보기 위함이었죠.
신묘년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해석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정인보는 비문 내용을 다르게 해석하여 주어를 왜가 아니라 고구려로 하여 고구려가 백제를 격파하고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희진은 비문 내용이 일본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주장을 했는데요 요지는 석회를 발라 비문을 일본 측 의도에 맞게 윤색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정인보의 주장은 한문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봤을 때 주어를 바꾼다는 해석은 상당히 어색하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진희의 주장은 중국 학자 왕건군의 현지 조사 결과 틀렸다는 게 증명되었죠.
그렇다면 일본 식민사학자 측 주장이 맞나?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현재 일본 역사학자들도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식의 남선경영론은 사실이 아니라고 보고 있는데서 알 수 있죠. 그럼 이 신묘년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신묘년조를 비판적으로 해석해야겠죠. 옛사람의 흔적들을 사료라고 하는 데 어떤 역사 학자든지 사료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습니다. 사료는 현재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힘든 표현이나 생각이 들어가 있는 데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거짓말이 섞여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사료를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사료비판이라고 합니다. 역사를 탐구할 때는 기본적으로 사료비판을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신묘년조의 내용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사료비판을 거쳐야 합니다. 논란이 되는 부분 즉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속민이다라는 것과 왜에게 정복될 정도의 국력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속민이라 했지만 적어도 백제는 속민이 아니었습니다. 고구려의 왕까지 죽인 위협적인 존재였죠. 이 부분은 거짓말입니다. 왜가 바다 건너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부분도 거짓말이거나 과장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한반도 남부에는 왜계 무덤들을 근거로 두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왜계 무덤은 몇 개 되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왜계 무덤으로 나주의 전방후원분이 있는데 일시적인 기간에만 나타났으며 수많은 토착 재지 세력의 무덤들에 비하면 소수라 왜의 지배는 말이 안 되는 것이죠. 오히려 용병 정도로 해석함이 옳을 듯합니다. 그리고 당시 나주 쪽은 백제의 영역이 아니라 마한의 영역이었습니다. 신라 쪽에는 전방후원분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면 왜가 바다 건너 백제와 신라를 무력으로 지배했다는 건 거짓입니다.
그렇다면 왜 광개토대왕릉비에선 이런 거짓말을 쓴 것일까요? 고구려가 전쟁의 명분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전연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백제와의 전쟁에서는 왕까지 전사한 고구려는 소수림왕대부터 내정개혁을 통해 국력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대에 이르면 정복전쟁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죠. 문제는 전쟁의 비용입니다. 전쟁은 많은 인명피해를 낼 수밖에 없고 많은 자원이 소비되어 비용 소모가 극심합니다. 따라서 백성들에게 명분을 줘야 백성들이 지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핑계라도 명분으로 삼아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죠. 고구려는 한반도 남부로 진출하고 싶어 했고 명분으로 왜라는 외부세력에 의해 백제, 신라가 고통받으니 이를 고구려가 구원해준다는 의유를 된 것입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릉비가 엄밀한 역사서가 아닌 기념비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날 전국 곳곳에 있는 기념비들을 보면 좋은 내용만 적혀 있지 나쁜 내용은 없습니다. 이것은 본래 비석이 갖고 있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묘지명을 새길 때는 그 사람의 좋은 점만 새기고 나쁜 점은 역사에 기록한다는 것이 동아시아의 역사 전통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광개토대왕릉비도 광개토대왕의 위대한 업적을 홍보하여 찬양하려는 목적이 담겨 있는 것이죠. 그러니 전공 역시 과장할 필요가 있을 것이고 왜와의 전쟁에서도 약한 종족과 싸워 이겼다는 것보다 거대한 세력과 싸워 이겼다고 말하는 것이 폼이 나겠죠.
전두환 기념비. 기념비는 본래 인물이나 사건을 찬양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출처 : 한겨레 신문)
위에서 살펴봤듯이 신묘년조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환경은 다르지만 살고 있는 사람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 듯합니다. 과거 사람들이라면 어떤 생각에서 이런 유물을 남겼을까 하고 생각을 하면 역사의 숨겨져 있는 면모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