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아빠가 목을 매단 채 죽어있었다. 난 경찰서에 자살한 사람이 있다고 신고했다. 바닥에는 유서가 있었다.
‘더 이상 너를 볼 면목이 없구나, 나는 아버지가 아니다. 미안하다.’
당연한 말이었다. 그는 어제 술에 전 채 돌아와 날 겁탈했다. 난 아무런 저항하지 않았다. 그가 취한 목소리로 그걸 요구하자 대답도 하지 못했다. 거칠게 내 몸을 부여잡고 그는 ‘그 짓’을 했다. 그는 죽어도 마땅했다. 경찰은 곧 도착했고 시신을 수거해갔다. 그 뒤의 일은 지루했다. 아버지가 자살한 이유를 알고 있냐고 물었고, 난 엄마가 사라진 이후로 아버지가 줄곧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내 가족관계를 확인했고 나를 딱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고아가 되었다. 그건 내 삶에서 그리 많지 않은 유쾌한 일 중의 하나였다.
난 곧 보육원으로 보내졌다. 그곳에 가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계획을 짜는 것이었다. 중학교 삼학년이었던 나는 열아홉이 되어 보육원에서 나오기 전까지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대부분의 보육원생들은 얼마 되지 않는 생활보조금을 받고 버려지니까. 고아였기에 내가 가장 먼저 제거한 요소는 결혼 가능성이었다.
혼자였고 고아인 사람과 결혼할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특히 그런 일로 고아가 된 경우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쪽으로는 신경을 꺼두는 것이 이후의 삶에 이로웠다. 결혼 가능성을 제외하고 나니 사춘기에 으레 가질 법한 연애에 대한 호기심과 관련된 일련의 불필요한 감정 모두를 계획에서 배제할 수 있었다.
같은 이유로 또래 집단에서의 마찰, 그와 관련된 감정 또한 고려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런 식으로 삶이 순조롭게 흘러가는데 장애가 될 만한 요소를 모두 없애고 나니 남은 것은 철저히 생존을 위한 것뿐이었다. 더욱이 나의 환경 요인은 상대적으로 몹시 불리하기에 확실하게 하나에 집중하지 않으면 초기의 불행한 상태로 돌아가 버릴 위험이 상당히 크다. 다행히도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난 나는 포기하는 것엔 익숙했고 집중하는 데에는 재능이 있었다.
살아있었기에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불필요한 것을 모두 잘라 내어버린 계획표의 목표는 하나였다. 끝까지 살아남기 그것을 위한 방법으로 내가 선택한 길은 우선은 공부였다. 보육원 기간 내에 공부에 집중해 가장 좋은 대학에 들어간다. 이후 가장 좋은 직장에 들어간다. 그게 전부였다. 다른 불순물은 들어올 틈이 없었다. 그런 계획표의 단순함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 하나를 완벽하게 이루기 위한 계획은 건축가의 설계도면처럼 복잡하지만 정확하게 짜여야 했고 그 설계대로 내 삶을 완성하기 위해선 큰 노력이 요구되었다.
실패는 없었다. 난 내가 그렸던 길 위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았고 어느새 서른둘이 되었다. 난 회사에서 가장 젊은 여자 팀장이었다. 어디에선 일에 미친 여자라는 소리가 들렸고 어디에선 어느 사장이랑 잤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일에 미친 여자라는 소리를 맞는 말이었고 어느 사장이랑 잤다는 이야기는 완전 헛소리였으니까.
나는 단지 유능하고 일밖에 할 줄 모르는 여자였다. 목적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살아가기.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아침에 일어나면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간단한 방정식이나 기하 문제를 풀었다. 계산이 끝나고 답을 찾아냈을 때쯤엔 어지러웠던 일의 순서가 정리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유의미한 문제는 확률과 경우의 수였다. 푸는 순서를 옳게 잡지 않으면 합리적인 직관을 잃어버리고 오답을 내고 만다.
선택한 길이 옳다면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 같은 문제는 선물 상자의 리본이 풀리듯 손쉽게 풀린다. 책상 위에 펼쳐져 있던 책의 문제를 보고 샤워를 하면서 문제를 푼다. 옷을 입으면서 검산을 하고 집을 나서기 전에 문제를 다시 한번 보고 내가 내린 답이 맞는 것을 확인한다. 하루의 깔끔한 시작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출근하면 진짜 문제가 내 자리 위에 기다리고 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머리를 굴려야 할 때다. 사람이란 변수는 숫자보다 복잡하니까.
퇴근 후 얼마 전에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프로젝트를 기념하는 회식을 가졌다. 우리는 식당에 들어가 한 자리를 차지했다. 메뉴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난 팀원들을 바라보았다. 이번 일을 성사시킨 대가로 팀원들을 사기진작해주어야 했다. 김연수, 안유리, 최현우, 노성민 이들이 내 팀원들이다.
왼쪽에 앉은 짙은 보라색 넥타이의 남자는 김연수(30), 말수가 적고 시킨 일은 정확히 해낸다. 까다로운 일을 맡길 수 있는 믿을 만한 팀원, 단점은 다른 팀원과의 교류가 전무하다고 볼 수 있다. 소통이 필요한 순간에도 입을 다물고 있는 경우가 많다. 능력 없는 다른 사람과 일을 나누는 것보다 차라리 본인이 다 처리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기에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업무만 배분해준다. 업무 수행 능력 80%, 팀원 중 예측하기 가장 쉬운 타입이다.
주문했던 메뉴가 나오고 모두 앞에 술잔이 놓였다.
“그럼 건배해야죠, 팀장님! 구호는 뭐로 할까요?”
방금 말을 한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는 안유리(26) 팀의 막내이다. 털털한 성격에 내숭도 없어서 사내 남자들에게 인기가 좋다. 정작 본인은 사내 연애에 전혀 관심이 없다. 친구를 통해 알음알이로 이런저런 남자를 만나는 듯하지만, 결과는 늘 좋지 않은 걸로 보인다. 명랑한 성격으로 팀 분위기를 조성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사교성이 0에 가까운 김연수도 안유리가 농담을 하거나 사근거리며 말을 할 때는 주의 깊게 그녀의 말을 듣는다. 업무 수행 능력은 60%로 낮은 수준이지만 팀에서 비중은 상당히 높다. 그녀를 잘 활용해서 팀원들 간의 친목을 다질 필요가 있다.
“역시 유리 씨가 있어야 회식 분위기가 산다니까.”
그 맞은편에 앉은 건장한 체격의 남자는 최현우(34), 평소에도 서글서글한 미소를 항상 달고 다니며 본성이 사람을 좋아하는 호인이다. 하지만 그것과 더불어 상황이 긴박해지거나 업무가 몰렸을 때 쉽사리 흥분하는 다혈질이기도 하다. 다행인 것은 그가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더라도 내 앞에서는 최대한 참으려 한다는 사실이다. 팀원 중 나를 제외하고 가장 오랫동안 회사에 다녔지만 승진을 하지 못하고 내 팀원으로 머물고 있다. 이유는 아마 다혈질 성격으로 입사 2년 차에 부장에게 저질렀던 ‘그 사건’ 때문으로 알고 있다. 업무 수행 능력 75%
“박 팀장님은 남자친구 없어요?”
이쪽은 노성민(28) 사내 여자들과 두루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 사실 때문에 몇몇 남성 사원들에게 알게 모르게 미움을 받고 있다. 그러나 특유의 붙임성 좋은 성격 탓에 아직까지 직접적인 마찰이 일어나진 않았다. 진지한 면모가 부족하다. 업무 수행 능력 65% 나에게 계속 접근하는 것이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 매번 회식 때 마다 나에게 선을 넘지 않은 사적인 질문을 해온다. 가능성이 있다. 조심할 필요가 있다.
회식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2차를 가자는 건의가 나왔지만 안유리가 집에 가겠다고 하자 그 제안은 곧 무산되었다. 김연수와 최현우, 안유리는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내려갔고 나와 노성민은 함께 길을 걸었다. 노성민은 집이 근처라 걸어가겠다고 했고 나는 회사로 돌아가 책상을 정리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가는 길 내내 노성민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노성민을 다룰 때 유용하다 싶을 정보만을 가려들었고 그 외의 정보는 다른 귀로 흘려보냈다. 회사 입구에 도착했을 때 나는 잘 가라고 인사를 해 노성민과 헤어질 생각이었다. 그런데 노성민이 예상에도 없던 행동을 했다. 잠시만 시간을 내어줄 수 없냐는 부탁이었다. 무엇을 위해서 그런 말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우린 시간을 내어서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그 정도 시간이면 우리 사이에 할 말은 대부분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시간을 내어달라는 요청을 하는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그러겠다고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노성민은 말을 찍어내는 공장과 같았던 방금 전 모습과 다르게 입을 다물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순간 난 시간을 내어달라는 말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어쩌면 노성민의 집은 이 근처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내게 무엇을 말할 작정이었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미안하지만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말하고 지금 회사로 들어가 책상에 있는 문서를 정리해야 한다. 다음 프로젝트 기획안을 수정해야 한다. 하지만 어째서 노성민은 이렇게도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대학교를 다닐 때 내게 집적거리던 남자들이 몇몇 있었지만 그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내게 곧 흥미를 잃고 무시했다. 그 이후로는 아무도 내게 접근해오지 않았다. 편했다. 그때처럼 노성민의 눈빛을 땅으로 떨어뜨려야 한다. 사라지게 해야 한다. 그저 팀원으로 있어야 한다. 승진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노성민이 내게 직장 동료 이상의 감정을 가진다면 그리고 이 정도로 행동할 정도로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가진다면 곤란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철저하게 외면하면 다음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내내 껄끄러운 관계가 지속될 것이고 이것은 좋은 방향이 아니었다. 적당히 타일러서 맘을 돌리게 해야 한다. 노성민 씨를 직장 동료로 매우 좋게 보고 있지만 그뿐이라고 노성민 씨는 좋은 사람이니까 나보다 나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달래야 한다.
우리는 근처에 있는 조용한 술집으로 갔다. 나와 노성민만의 2차였다. 술이 나오기 전까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 계산 중이었다. 노성민이 꺼낼 말의 후보를 골라내었고 그 말에 대응할 다음 수, 그리고 그 다음 수의 다음 수까지 계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성민이 첫 잔을 마시고 꺼낸 말은 내가 예상한 후보에는 없는 말이었다.
“제 친구 중에 음악을 진짜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요. 거의 온종일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고 감상평을 블로그에 올리는데 글을 꽤 잘 쓰는지 음악 커뮤니티에서 유명해져서 요즘 음악평론가로 여러 잡지에 원고를 쓰고 있어요. 그런데 진짜 웃긴 건 뭔지 아세요?
이 친구는 귀가 먹었어요. 아무리 좋은 음악을 헤드폰 끼고 온종일 들어도 이 녀석은 둥둥거리는 울림 말고는 아무 것도 못 느껴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 친구가 쓴 글을 보고 이 시대의 진정한 평론가라며 극찬을 해요. 잡지사에서도 글만 받으니 이 친구가 농인인 줄은 꿈에도 모를 거예요. 직접 만나면 못 듣는다는 사실이 들통날까 봐 인터뷰나 실제로 만나서 작업하자는 요청은 다 거절하거든요. 그것 덕에 오히려 녀석은 신비롭고 대단한 존재가 되었어요. 음악 마니아들에게 일종의 우상이 된 거죠. 팀장님은 이 친구를 어떻게 생각해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런 일은 생각해본 적도 없고 설사 지금 생각한다고 해도 그건 어떤 가치도 없었다. 농인이 음악을 듣는 게 뭐 어쨌다는 건가. 그래도 우려했던 일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노성민은 취했고 술기운에 허튼소리를 내뱉고 있는 것이다. 남자 사원이니 뒤처리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하고 집으로 가는 택시를 잡으면 하루가 무탈하게 지나갈 것이다. 별걱정을 다했다 싶어서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글쎄, 뭐 귀로는 듣지 못해도 듣지 못하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노성민은 교과서적인 대답을 듣자 소리 내어 웃어댔다.
“팀장님 너무 대답이 뻔하잖아요. 진짜 그렇게 생각해요? 거짓말이라고요. 개가 쓰고 듣고 무엇을 느낀다고 지가 말하는 게 다 거짓말이라는 생각 안 들어요. 비웃고 싶지 않아요?”
노성민은 많이 취했다. 대화를 끝내고 일어서야겠다.
“비웃고 싶지 않아요?”
내가 떠나려고 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노성민은 다시 진지하게 물었다.
“전혀.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이제 나가지?”
“저기 팀장님”
이건 안 좋았다.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건 진짜라고
“일도 잘하고 팀원들도 잘 챙겨주시고, 빈틈 하나 없고, 쉬는 것도 없고. 여유도 없고, 좋아하는 것도 없어 보여요.”
노성민은 회사 앞에서 보였던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좋아해요.”
최악이었다. 회사 앞에서 돌려보냈어야 했다. 실수를 해버렸다. 꼬였다. 이 문제는 실시간으로 재구성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딱 잘라 거절하면 너무 정 없는 인상을 줄 테고 적당히 무마하려 들면 노성민 같은 타입은 희망을 가진다.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할까. 거짓말은 문제를 푸는 게 아니라 문제를 만드는 것이다. 어서 머리를 굴려라. 하지만 문제의 실타래를 풀어내려 할수록 더 많은 실이 엉켜 머리를 감싸버려 머리를 굴리고 싶어도 굴릴 수 없었다.
“농담 아니고.”
노성민은 한 번 더 말했다.
“먼저 일어날 테니, 조심히 들어가세요.”
일단 나가야 한다. 나는 일어서서 계산대로 갔다. 그때 뒤에 노성민이 손을 잡았다. 순간 나는 너무 몰라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노성민의 뺨을 때렸다. 나도 몰랐던 반응이었다. 아마도 아버지가 유일하게 남겨준 유산인 그 사건의 기억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빌어먹을 트라우마. 속에선 구역질이 올라왔고 머리는 누군가 뒤에서 사정없이 방망이질해대는 것 같았다. 이건 너무 큰 실수였다. 노성민 역시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얼얼한 표정으로 그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방금 건, 도가 지나쳤어요. 내일 봬요.”
직원이 카드를 주었고 카드를 돌려받자마자 밖으로 나가 뛰었다. 대체 어떻게 되어버린 건지. 한참을 뛰다 뒤에서 오는 택시를 잡아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책상 위엔 아침에 풀었던 문제가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계산을 다시 해보았다. 아침 냈던 답과 다른 답이 나왔다. 계산을 다시 해보았다. 다른 답이 나왔다.
머리가 안 돌아가고 있다. 이런 적은 없었다. 어떤 문제도 풀 수 있었다. 수학만큼은 다른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이렇게 쉬운 문젠데, 노성민의 얼빠진 표정이 계속 숫자와 도형 사이로 겹쳐진다. 무슨 답이 맞는 건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다음 장에 있는 문제를 본다. 문제를 보는데 답으로 나가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길을 잘못 든 것이다.
최악의 경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