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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휘목 Oct 18. 2024

양치기 소년이 되더라도

퇴근길, 지하철 역엔 유난히 사람이 많았다. 비 때문에 버스를 타려던 사람들이 지하철로 옮겨온 탓이라고 추측했다.

열차 안에도 사람이 꽉 차있어 한 차를 보내고도, 다음 차에 한 명만 내려, 제일 앞에서 줄 서 있던 나와 두 명만 들어갈 수 있었다.

두 정거장을 더 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 내려, 5호선을 환승하려고 계단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오늘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계단 위에서 남자가 욕을 했고, 한 여자가 '여기 누가 넘어졌어요'라고 외쳤다. 

기시감이 들었고, 공포가 느껴졌다.

소영웅심을 발휘해, 119에 신고했다. 통화를 하면서,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가는, 내려오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열차가 도착하고, 통로가 꽉 찼다가, 조금 소강되기를 반복했다. 조금 사람이 줄었을 때, 그냥 계단을 타고 올라갈까, 괜히 유난 부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조금 일찍 가겠다고 계단에서 쓰러져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잠시 후 계단에 사람 수가 거의 줄기 시작했다. 이러다 구조대 분들이 도착했을 때, 상황이 원활해서 양치기가 되는 건가 걱정되었다. 

그러나 구조대원 분들이 아래로 내려왔다. 위에서 통제가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제가 신고자라고 했고, 신고 당시 상황을 진술했다.

"아까는 진짜 많았습니다. 진짜 많았어요."

지금은 완전히 널널한 계단을 바라보며, 변명하듯 말했다.

"잘하셨습니다."

서글서글한 목소리로 구급 반장님이 칭찬했다.

진술을 마치고, 현장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문득 떠올랐다.

내가 오기 전까지, 분명 더 심각한 상황이었을 텐데,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쪼록 다들 호들갑이다, 유난 떤다, 생각하지 말고, 진짜 위험해 보이면

진짜 위험한 것이니, 주저 말고 앞으로도 신고해야겠다 다짐했다.


양치기 소년이 되더라도, 늑대가 달려들 땐 도움을 구하고 봐야 한다.


ps.119만 불렀는데, 경찰 쪽에서도 나왔다. 온동네 사람들을 다 부른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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