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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숙소에서는 동해가 보였다. 커다란 파도가 앞선 파도를 할퀴듯 내리쳤다. 7층과 8층을 통째로 빌려, 학생들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각 호실의 문을 모두 열어두어, 원하는 사람들은 자유롭게 방을 오갈 수 있었다. 세록은 나준과 같은 방에 배정 받았지만, 큰 의미는 없는 듯했다. 처음에 함께 있던 4명은 술게임을 한 번 하더니, 텐션이 맞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 각자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준은 술게임이 재미가 없었는지, 구태여 다른 방으로까지 건너가 게임에 동참하지는 않았다. 대신 세록과 나준은 버스에서처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확히는 나준의 굴곡진 인생사의 후속편을 듣는 것이었다. 분명 같은 나이인데도, 나준의 인생은 세록보다 훨씬 더 길었다.
세록이 지친 정신을 깨우러, 바깥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가려 했을 때, 보라색 머리칼 남자애가 갑자기 안으로 들이닥쳤다.
"여기 뭐야. 노잼 파티야?"
덩그러니 방구석에 앉은 둘을 본 남자애가 말했다. 자신감이 뼛속까지 배인 듯한 말투였다.
"이자열 네가 더 노잼이야."
나준이 톡쏘듯 대답했다.
"잘 됐다. 여기서 좀 쉬고 갈게."
자열은 아무렇지 않게 방바닥에 大자로 뻗었다. 꽤 마셨는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아, 난 이자열이야."
뒤늦게 세록을 본 자열이 자신을 소개했다.
"난 신세록."
"자기 소개하는 거 완전 어색하지 않냐?"
"뭐, 조금."
"너 서울에서 왔지?"
"어떻게 알았어?"
"사투리 쓰잖아."
자열의 말에, 세록은 자신의 억양이 어땠는지 되살폈다. 두 마디만에 출신을 알아내다니, 그 정도로 자신의 사투리가 강했거나, 그 정도로 알아챌 만큼 자열이 사투리에 민감했거나 둘 중 하나였다.
복도에서 만취된 파란색 운동복 차림의 남자애가 풍차돌리기로 복도를 지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열이 잠들었고, 심하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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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터에서 사귄 사람은 자열과 나준 뿐이었지만, 둘은 지나치게 인싸였다. 둘과 함께 걸을 때, 세록은 거의 일곱 걸음에 한 번, 처음 보는 사람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학기가 시작하기도 전이었다. 강의계획서를 살펴보고는 나준이 수업 시간표를 짜주었다. 이대로라면 매일같이 셋이서 뭉쳐다닐 게 확실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수강 신청에 실패한 덕에, 세록은 진균학과 바이오 물리학은 따로 듣게 되었다. 세균정보학 실습 신청은 성공했다. 세록은 세균이 좋았다. 모든 세균의 목적은 자신과 동일한 존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였다. 인간 성체는 유전 정보를 전달하는 메신저에 불과하다. 인간 종의 실체는 탄생과 죽음, 그리고 탄생으로 이어지는 흐름이었다. 고정된 개체로서의 정체성은 미신이었다. 심리적 연속성은 생존에 필요한 자아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였다. 세균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런 고도화된 기만이 필요없다.
‘진화가 가능한 자립형 화학 시스템(A self-sustaining chemical system capable of Darwinian evolution)’이 생물의 정의였고, 이에 해당되는 가장 작은 단위가 세균이다. 세균은 오직 살기 위해서만, 존재했다. 세록은 두 눈으로 직접 독립적인 개체를 보고 싶었다. 깊이 있게, 차분하게.
그러나 세균정보학 실습 첫날, 세록은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자열을 보았다.
“나준이 시간표엔 이 수업 없잖아?”
“아, 몰랐는데, 통합 과정 필수 과목이라서, 다른 걸 하나 빼고, 여기로 바꿨어. 근데 너는 왜 여기 있어? 너도 통합 과정이야?”
통합 과정은, 학부 수업 중에 석사, 박사 과정을 이수해 박사 학위로 졸업하는 과정이었다. 그러한 목적에서 개설된 세균정보학 실습 강의이었단걸, 세록은 전혀 몰랐다. 자열이 통합과정생이라는 사실도.
“아니, 수강 신청에 실패했어.”
“하필이면 이걸 듣냐. AP로 생물학 원론 안 배웠으면, 빡세다든데.”
“넌 들었고?”
“고1때.”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자열이 대답했다.
“넌?”
대답을 머뭇거렸다.
“AP가 없었어.”
세록이 졸업한 서울세고는 명문고였지만, 특성화고는 아니었다. 고급 교육을 선이수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럼 같이 공부하면 되겠네, 완전 까먹었거든.”
강의 오티는 짧았다. 교수는 다음 수업부터는 실험실에서 수업이 진행될 거라고 다시 안내하고 강의실을 떠났다. 점심을 먹기 위해 세록과 자열은 생명과학대를 지나 중앙도서관 지하 식당으로 갔다. 그곳엔 나준이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준은 자신을 빼놓고, 자열과 세록이 같은 수업을 듣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식사하는 동안, 그리고, 일주일 내내 둘의 사이를 의심했다.
“너 말고 이자열 만나는 애 없어? 좀 수상한 애들 말이야. 자열이랑 무슨 소문이라도 나길 바라는 애들이 있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함께 걸을 때마다 자열과 팔짱을 끼는 나준, 본인이 더 의심받아 마땅할 텐데, 세록은 나준의 기준을 알 수 없었다.
세록은 잠들기 전 하미에게 페이스콜을 걸었다. 하미의 모습이 홀로그램으로 떴다.
"잘 지내?"
"너는"
"나야, 그대로지. 어머니는 잘 지내셔."
이무의 안부를 묻진 않았지만, 하미가 굳이 알려주었다.
"수업은 따라갈 만해?"
"그런대로. 이상한 무리에 낀 거 같긴 하지만."
"친하게 지내 봐. 상냥하게 굴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
하미가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충고, 고마워."
세록은 빈말을 했다.
"항상 응원하고 있어."
하미는 '응원'이라는 단어를 꾹꾹 눌러 말했다. 반려체가 진심을 표현하는 방식일까. 보이지 않았던 것이 눈에 보였다. 반려체들은 항상 진심일 테니, 특별히 진심을 담을 필요는 없었다. 통화를 종료했다. 하미의 푸른 눈이 잔영처럼 어둠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