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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했다. 완전히 잊고, 할 일을 하자. 라고 했지만, 매일같이 메일함을 들춰보았고, 게시판을 기웃거렸다. 기대라는 위태로운 탑을 쌓고 있었다. 집중력이 자주 흐트러졌다. 현실과는 다른 레이어 위에서 걷는 것 같았다. 미래에 의미를 둘수록, 현재의 가치는 하락했다. 분노의 뒷면은 무기력이었고, 무기력의 뒷면은 분노였다. 잘못 디딘다면, 쉽게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쉽게,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결국 인간이었다. 희망하고, 꿈꾸고, 바라는. 욕심이란 결정이 심장에 박힌.
자열과 나준이 점심을 먹자고 했지만, 세록은 거르겠다고 했다. 오늘 중으로 발표가 나기로 예고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까지 예민하고 싶지 않았는데. 저항할 수가 없었다. 식사하는 것 대신 제2공학관에서 중앙도서관으로 가는 샛길을 걸었다. 먹이가 될 벌레를 죽이지 말라는, 고슴도치 수호대의 현수막이 나무와 나무 사이에 걸려 있었다. 현수막 속 고슴도치는 귀엽지도 않았다. 고슴도치 수호대 일원 중 하나가 기숙사에서 고슴도치를 몰래 키우다 애완행위금지법 위반으로 잡혀갔다는 풍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세록은 고슴도치 내부에서 자연생성된 메티실린 내성 황색 포도상구균(MRSA)에 대해 생각했다. MRSA는 인간이 항생제를 사용하기도 전에 항생제에 대한 저항력을 가진 슈퍼박테리아였다. 항생제 내성은, 항생제 과용에 의해서 발생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인간의 오만한 시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사례였다. 내성을 가진다는 것은, 종 차원에서의 진일보를 의미했다. 세록에겐, 현실에 대한 내성이 필요했다.
샛길에서 나와 중앙 도서관을 한 바퀴 돌았다. 도서관 앞에서 학생 두 명이 심리학 설문조사에 참여해달라고 부탁했다. 소셜미디어을 통한 간접외상의 경험이 있는지에 대한 설문조사였다. 세록은 설문에 응했지만, 비협조적으로 답변했다. 아마 응답 결과는 이상치로 나올 것이다. 도서관 뒤 언덕에 올라 교정을 내려다 보고 나서, 세록은 방향을 돌렸다. 오후 1시였다.
연구실을 문을 열자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야, 대단하다. 어떻게 이게 되냐. 연구실의 자랑이다.
다들 한 마디씩 했고, 자신의 일인 것마냥 환호했다.
세록은 어안이 벙벙했다.
“다시 봤어, 근성 있네.”
칭찬이 끝없이 쏟아졌다.
나준에게.
나준은 평소처럼 에헴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모습에, 동료들이 키득거렸다. 세록은 6만 달러를 구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던 게, 우습게 느껴졌다. 결국 안 될 거였는데, 보이지 않아도 될 밑바닥을 자열에게 보여주었다. 최선을 다했다는 말은 의미가 없었다. 최선을 다해서 이뤄내지 못한다면, 최선을 다한 한계가 거기까지라는 의미였다. 겁쟁이들이 최선을 다하기 두려워하는 이유였다. 세록은 겁쟁이가 아니었다. 단지 패배자였다. 피하고 싶은 결정적인 진실이 세록을 후려갈겼다.
“아쉽게 됐네.”
약올리듯 자열이 말했다.
“아쉽지 않아. 되면 되는 거고, 안 되면 안 되는 거야. 0.0001%로도 모자라면, 0이나 다름없어. 연구랑 마찬가지라고.”
세록은 채찍질하듯 말했다.
“이따 저녁에 축하 파티 있는데, 안 올 거지?”
“당연히 가야지.
세록은 화장실로 갔다. 방향제를 바꾸었는지, 이전과 다른 시큼한 향이 났다. 자극적인 냄새에, 헛구역질이 저절로 나왔다. 무슨 자신감이었던 걸까. 세록은 자신의 순진함을 탓했다. 화장실 칸막이에 등을 대고 쪼그려 앉았다. 서있는 것보다는 조금 나았다. 이대로 눈을 감고 싶었다. 그러나 심장과 뇌, 혈관과 근육, 신경과 지방이 허락하지 않았다. 세록의 대사는 쉬지 않고, 세록을 움직이게, 살아있게 했다. 몸안에 있는 모든 미생물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숙주의 생존을 지지했다. 축축한 사실들이었다. 속을 한 번 게워내고, 문을 열고 나왔다. 세면대 거울 앞에 나준이 손을 씻고 있었다. 세록을 발견한 나준이 예의 그 활발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세록은 빈말로 축하를 건넸다.
저녁 회식 자리, 세록 앞에 다이어 교수가 앉았다. 덩치가 큰 탓에 옆자리 사람들이 반 칸 더 밀려나야 했다.
“애석하게 되었어.”
“괜찮습니다. 다른 좋은 기회가 있겠죠.”
“사이언스 포춘에 어떻게 지원했니, 추천서도 받으러 오지 않았잖아.”
다이어 교수가 술을 따르며 물었다.
“추천서는 필수가 아니었어요.”
세록이 잔을 받았다.
“지도교수의 추천서가 아니어도 된다는 거지, 추천서 자체는 필수잖아. 지도 교수인 내가 아니라 홍 교수님께 받은 이유가 궁금해서 묻는 거야.”
“국외로 출장가셨는데, 방해드리고 싶지 않아서 홍 교수님께 부탁드렸어요.”
세록은 있는 그대로 말했다.
“지도 교수가 있는데, 그러면 내가 뭐가 되니.”
날선 말이었지만, 목소리는 온화했다. 다이어 교수의 특기였다.
“실례했다면, 사과드립니다.”
“아냐, 그럴 필요 없어. 그래서 내가 직접 사이언스 포춘에 따로 추천서를 보냈어.”
다이어 교수가 미소지었다.
“그래서 애석하다고 말한 거였어. 네 말대로 다른 좋은 기회가 있길 바라. 그때는 꼭 나를 거치고 가렴.”
불안했다. 세록은 이것이 자신이 탈락한 이유가 아니길 빌었다. 나준이 더 좋은 연구자로 평가 받은 것이 맞고, 그만한 인정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게 옳아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그게 아니라면, 세록은 다이어 교수를 용서할, 세상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네 그러겠습니다.”
한 잔을 비웠고, 또 잔을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