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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 노튼 Sep 03. 2021

증발하고 남는 것

이번 작문 과제 주제는 '증발'입니다


“툭툭툭. 툭툭툭툭. 툭툭툭. 툭…”

오전 6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기 무섭게 미싱기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시다들도 빼곡히 놓여있는 책상 사이를 오가며 봉제사의 지시에 따라 분주하게 움직인다. 12살 먹은 시다 미정이는 황색 실을 미리 준비해 두지 않아 오늘도 광석이에게 쌍욕을 먹고 있다. 내 여동생과 갑장인데 학교도 가지 못하고 일하는 모습을 보니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화를 내는 광석이의 마음도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니다. 부모님이 없는 광석이는 퇴근 후 세 살, 여섯 살배기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데,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집에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나만 해도 퇴근 후 막둥이를 보는 낙으로 매일을 버틴다. 오늘은 그나마 물량이 적은 날이라 오후 8시에는 집에 갈 수 있겠다. 가끔은 미싱기가 부럽다. 이 녀석은 온종일 쉴 새 없이 일해도 피곤하지 않기 때문이다. 뻑이 나면 수리공을 불러 부품 몇 개를 교체해주는 것만으로 금세 멀쩡해진다. 나도 이렇게 쉽게 힘을 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갈수록 힘이 약해져 가는 것 같다.


지난주엔 한 괴짜 녀석을 만났다. 얼굴도 멀쩡하게 생긴 것이 두꺼운 책 하나를 옆구리에 껴들고는 찌라시를 돌리고 있었는데, 찌라시의 내용이 가관이었다. 글로법? 인가를 우리 회사가 어기고 있다면서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임금을 올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되면 내야 좋지마는. 회사가 땅파묵고 사는 것도 아닌데 미칬다고 그런 걸 해주나? 옛말에 달콤한 음식일수록 몸에는 나쁘다고 했다.


오후 8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자 할당량을 끝낸 봉제사들은 기지개를 켜며 밖으로 나갔다. 옷에 땀이 흥건히 젖었다. 평화시장을 지날 무렵 피켓을 들고 빨간 머리띠를 두르고 데모를 하는 한 무리가 보였다.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다!”

“근로기준법 준수하라!”

가운데서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그 괴짜였다. 한여름에 두꺼운 옷을 입고는 노조라는 곳에 가입해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빨간색의 머리띠는 땀에 젖어 검붉은 색을 띠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괴짜는 자신의 몸에 기름을 붓더니 공장 노동자들을 향해 더 크게 소리치며 달려가다 시장 한복판에 멈췄다. 그때였다. 데모 무리에 있던 한 사람이 기름에 불을 붙였다. 그의 두꺼웠던 솜옷을 타고 불이 삽시간에 몸 전체에 옮겨 붙었다. 나를 포함한 지나가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이해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린 한 사람이 자신의 옷으로 괴짜의 몸을 덮어 불을 껐다. 그는 등에 업혀 어디론가 실려 갔다.


십여 분 간 내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믿기지 않아 한참을 넋을 놓고 있었다. 잠깐 환상을 본 것일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시장 바닥엔 마치 무언가가 증발한 듯 까만 그을음이 져 있었다. 오늘은 집에 가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다. 봉제사해서 밥을 굶지는 않을 낀데. 왜 그런 걸까. 집 앞 골목 어귀에 도착하니 동생이 골목에 아예 의자를 가져다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발견하자마자 종종걸음으로 달려와서는 내 품에 안겼다.


“오빠 몸에 땀 냄새난다. 니한테 배긴다. 얼른 드가자.”

“난 오빠 냄새 좋기만 하다. 다 내 학교 보낼줄라꼬 이라는거 아이가. 오빠야. 고맙데이.”

“가시나 오늘 와이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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