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일 사랑했던 놈이예요"가 들어가는 글을 한 편 쓰세요.
파주에 위치한 결혼식장은 아주 단출했다. 작은 예배당 느낌에 가까웠다. 샹들리에나 천을 두른 화한 하나 없이 신부가 올라갈 단상을 바라보고 스무 개 남짓한 의자가 있었을 뿐이다. 친한 지인들만 급하게 연락을 돌린 것 같았다. 결혼식을 한 시간 앞두고 한두 명씩 하객들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안면이 있는 한나의 지인들을 만나 함께 신부대기실로 들어갔다.
“그래서 신랑은 어떤 사람이야?”
신부대기실에 있는 모두가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청첩장엔 신랑과 신부의 이름이라도 나와 있는 게 보통이지만 한나가 보낸 모바일 청첩장에는 신랑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형제.. 아니 남매처럼 한나의 연애사를 다 지켜본 나로서는 결혼식 당일까지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게 서운하던 참이었다. 원래 평범한 애는 아니긴 했지만. 순백색의 드레스를 입은 사월의 신부는 우리에게 잠시 앉을 자리를 마련해준 뒤 숨을 깊게 한번 고르고 입을 뗐다.
“내가 문득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느껴지더라고.”
한나가 꺼낸 첫마디는 꽤나 당황스러웠다. 한나는 과거에 만났던 남자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스물둘 한나에겐 열렬히 사랑하던 남자가 있었다. 우리보다 나이가 네 살은 많은 남자였다. 마른 몸에 큰 키, 양팔을 덮은 이레즈미가 눈에 띄었고 특정한 직업은 없었지만, 명품 옷과 시계를 SNS에 자랑하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천성 양아치라고 생각했다. 매일 클럽에서 술과 함께 보내는 그를 짝사랑하는 한나를 말렸다. 하지만 한나는 그의 눈에 띄기 위해서 부모님에게 손을 벌려 큰 성형수술 감행하고 악착같이 알바를 해 모은 돈으로 비싼 옷을 사 입었다. 한나는 클럽에 따라가 먹지도 못하는 술을 겨우 넘겨 대며 그에게 구애했지만, 그가 한나에게 관심을 줄 때는 어쩌다 헌팅에 실패한 날 정도였다. 데이트는커녕 술에 취한 밤에만 한나의 집으로 남몰래 찾아갈 뿐이었다.
이후 한나는 사랑 따윈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여러 남자들과 캐쥬얼한 만남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만난 뚱뚱한 남자는 보통 사람들과 달리 집요하게 한나와 사귀길 바랐다. 운명의 상대를 만난 것 같다며 집요하게 선물 공세를 퍼부은 끝에 한나의 마음이 열린 것이다. 노력하는 모습이 귀엽지 않냐며 곧 청혼받을 것 같다고 배시시 웃던 한나의 환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남자의 어머니가 한나를 극렬히 반대한 까닭에 마마보이였던 그가 이별을 통보한 것이다. 엄마가 왜 너의 삶을 결정하냐는 한나의 살기 어린 외침에 마마보이는 화를 참지 못하고 한나의 얼굴과 배를 때렸다. 넘어진 한나를 두고 마구 밟아 옷마저 모두 버렸다고 했다.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한달이 지나고 멍이 다 빠졌을 때쯤이다.
이후 한나는 우울증에 걸렸다. 집에만 박혀 멍하니 몇 시간이나 허공을 응시했다. 문득 어린 시절의 순수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한나는 장롱 깊은 곳에 있던 고등학교 졸업 앨범을 꺼냈다. 옛날엔 친했지만, 지금은 살아있는지도 모르게 된 친구들을 보니 코끝이 찡해졌다. 한나네 반 페이지에서 한 남자아이가 눈에 확 띄었다. 김창석. 그 이름 참 오랜만이네. 그리 잘생기지도 키가 크지도 않았지만 똘망똘망 한 눈으로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대했다. 중학교 시절 내가 왕따를 당해 교실 뒤편에서 일진들에게 맞고 있을 때도 당장 멈추라고 소리치며 말리던 유일한 아이였다. 싸움은 못 했던 탓에 같이 두들겨 맞은 후로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한나에게도 김창석은 인상 깊은 친구였다. “창석이와 대화를 나눴어. 아주 가까운 곳에 살았거든. 이 사람을 사랑해야겠다는 확신이 오더라.”
한나의 친구들은 모두 당황한 눈치였다.
결혼식 시작이 임박하자 우리는 모두 식장에 착석했다. 사회자는 없었다. 조명이 잠깐 꺼졌다가 켜지면서 신부 입장 노래가 흘러나왔다. 한나는 하객들을 향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한나는 신부 자리에 서 있지 않고 단상에 설치된 마이크를 꺼내 들었다.
“참석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합니다. 저는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찾기 위해 청춘을 낭비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걸 잊고 있었더라고요. 졸업 앨범을 보다가 깨달았어요. 김창석. 내가 제일 사랑했던 놈이에요. 여자가 되기 전의 제 이름이요. 정말 멋있는 녀석인데 그 모습을 지우려고만 했거든요.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데 누가 절 사랑하겠어요. 그래서 저는 평생 김창석을 사랑하기로 여러분께 약속드립니다. 김창석과 김한나. 모두가 사랑하는 제 모습이에요. 달팽이처럼요.”
김창석. 아니, 김한나. 뭐라고 부르든 너는 정말 또라이고 좋은 친구다. 꾹 참고 있던 눈물이 시야를 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