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읽으려 했으나 번번이 끝내지 못 한 채로 뒤로 밀리곤 했다. 그때 느낌은 책이 생각보다 무겁다는 것이었다.
암스테르담에서 고흐 미술관을 갔을 때 그의 그림에 푹 빠져 들었다. 어찌 이런 그림들이 당대에 그렇게 외면을 받았을까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에게도 그 충만한 생명력이 느껴지는데 ᆢ
오베르 쉬즈우하즈는 고흐가 인생 마지막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청명한 가을빛 속에 빛나던 고요한 마을.
마을입구로 들어설 때부터 고흐 그림 속으로 들어서는 듯한 친숙함을 줬다. 눈에 익은 들판과 나무들.
마을에 도착하자 시청 앞에는 고흐가 서서 그린 위치에 시청그림 푯말이 서 있었다.
시청(말이 시청이지 작은 건물이다) 건너편엔 고흐가 죽었던 라부여인숙이 있다. 그 여인숙은 지금도 고흐 때처럼 1층이 카페로 운영되고 있다. 그 카페 앞엔 테이블이 하나 놓여있고 와인병과 와인잔이 둘 놓여있다. 고흐를 위한 것이라 한다.
와인이 놓여있지 않으면 카페가 문을 열지 않은 날이다.
라부 여인숙
한 잔은 고흐ᆢ또 한잔은 누구일까?
외로웠던 고흐의 평생 소울 메이트였던 동생 테오일까?
나는 막연히 고흐가 마치 베토벤처럼 까다롭고 무섭거나, 미치광이 예술가의 기질이 다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흐 편지에서 읽히는 고흐는 인품이 훌륭하고 사유가 깊은 사람이었다. 예술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열정을 항상 품고 있었으며, 위선과 형식적인 것을 혐오하며 지극히 본질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공감하고 나누려 했고 그들을 그리며, 밀레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고된 삶을 그린 그림을 높이 평가했다.
그 당시 기성 화가들이 걷던 길을 걷지 않았기에 또 그들이 그린 화풍과 달랐기에 상업적으로 철저히 외면당했다.
테오가 보내주는 돈으로 살았기에 물감과 모델료를 먼저 지불하고 제일 마지막이 음식이어서 늘 굶주리고 허약했으며 갈수록 건강이 나빠져 스스로 오래 못 살 거란 생각을 했다. 30대의 청년이 스스로 영감 같다고 여겼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늘 테오가 주는 돈을 미안해하며 그림이 하나라도 팔리면 테오에게 신세를 갚을 수 있을 거라고 앞으로 잘 될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흐에게 발작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취급을 했지만 나는 그것이 몸이 허약해져 뇌신경학적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간질 같은 발작. 발작이 시작되며 스스로 통제되지 않는 시간들이 늘어났고 정신병원에 가야 한다는 말을 따르며 단지 그림만 그릴 수 있게 해 달라고 한다.
갈수록 그림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삶을 산다.
정신병원에서 나오고 파리근교 오베르 쉬즈우아즈로 와서는 기껏 70여 일 정도를 살았는데 그동안 70 여점의 그림을 그렸다. 거의 하루 한 작품씩을 그린 것이다.
<뿌리들> 이 작품을 그린 지점을 우연히 코로나 기간에 재택근무하던 고흐 연구원이 발견했다 한다
고흐의 유작이라고 하는 까마귀 나는 밀밭을 그린 곳이다. 5월이나 6월쯤에 오면 그림 같은 풍경을 볼 수 있다 한다.
- 새벽 4시면 잠에서 깨어나 창가에 앉는다. 그리고 목초지와 목수의 작업장, 일터로 나서는 사람들, 들판에서 커피를 끓이기 위해 불을 피우는 농부들을 스케치하지 ᆢ
그림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림 외의 어떤 것에도 주의를 빼앗기고 싶지가 않다.-
- 그토록 짧은 시간에 그토록 많은 작품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쉬지 않고 계속 작업해 왔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하루종일, 먹거나 마시는 시간까지도 아낄 정도로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림을 그리러 가는 화가. 1888
마을에 있는 고흐동상
막상 들판에 나가면 바람과 추위와 비등 날씨와 싸우며 그린 이야기들이 많다.
- 내가 책을 읽는 이유도 그 책을 쓴 작가가 사물을 더 넓고 더 관대하게, 그리고 사랑으로 바라보고, 현실을 더 잘 알기 때문에 배울 것이 있어서이다. 그러나 선과 악, 도덕에 대한 군소리에는 정말 관심이 없다.-
고흐는 살아있는 생애동안 끊임없는 독서로 내면의 깊이를 더해나갔다. 그래서 테오의 편지나 다른 사람들의 글에 보면 고흐를 만난 사람들은 누구든 고흐를 존경하고 좋아했다고 한다. 인간적이고 따뜻했으며 또한 박학다식했다.
고갱과의 다툼은 예술에 대한 첨예한 인식적 갈등으로 시작되어 그 당시 이미 신경적으로 격해진 성격이 어우러져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 이후에도 고갱에게 다정한 편지를 썼으며 고갱을 도와주라고 테오에게 말하는 내용도 있다.
- 그림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한 요즘, 작업을 방치해 둔 채 감상에 젖거나 낙담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봄에 딸기를 먹는 일도 인생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그건 1년 가운데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하고, 지금은 가야 할 길이 멀다.-
- 산책을 자주 하고 자연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예술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길이다. -
그림밖에는 없는 인생이 되었지만 그 어느 한쪽에서도 빛이 들어오지 않는, 숨 막히게 조여 오는 인생을 살았던 너무나 처절했던 고흐의 삶에 눈물을 흘리며 서간집을 읽었었다.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쏘고도 바로 죽지 못해 피를 흘리며 스스로 여인숙 2층 방까지 기어 올라가 이틀을 더 고통받고 죽어간 고흐 삶에 나는 잠깐 하나님은 계시는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생전 유화 작품 하나가 팔렸는데 그것도 테오의 부인 집안에서 격려차 사 준 것이라 한다.
고흐가 죽기전쯤 점점 고흐의 그림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지만 고흐는 그들의 평론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고 조심스러워했다.
이렇게 고통으로 점철된 것들이 역사의 시간을 뚫고 살아남는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나는 그래도 고흐 생전에 환하게 웃으며 자기 그림이 인정받는 것을 보았다면, 돈걱정에서 벗어나는 시간을 조금만이라도 누렸다면 하는 속절없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흐는 진실로 영혼으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그림을 모르는 나 같은 사람도 그의 그림에 전율하게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