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소풍을 간다. 비상이다. 나는 내일 아침 김밥을 싸야 한다.
아직도 선명한 유년의 기억. 이상하게도 소풍날엔 눈이 저절로 떠졌다. 주방에 가 보면 새벽부터 엄마는 쭈그리고 앉아 김밥을 싸고 있었다. 다양한 빛깔의 재료들, 고소한 참기름 냄새, 눈을 비비는 뿌연 시야 너머로 엄마는 김밥을 한입 넣어주셨다. 입안 가득 환하게 퍼지는 싱싱한 재료들의 대향연은 아니었고 김밥맛이었다. 이제 내가 김밥을 싸게 되니 참맛을 알겠다. 엄마의 김밥은 내가 싼 것보다 더 맛있었을 것이다.
평소 일어나는 시간보다 20분 먼저 알람을 맞췄다. 아내는 그 정도로 되겠냐 물었지만 자신 있었다. 3줄만 싸면 되니깐. 달걀물을 풀고 지단을 부친다. 기포가 올라오지 않게 뭉근하게 익혀 뒤집는다. 당근은 채 썰어 식감이 살아있게 살짝 익히고, 건강에 좋지 않은 햄도 오늘만큼은 기분 좋게 구워준다. 김에 밥을 얇게 펴 바른다. 밥이 많으면 맛이 없다. 빠진 재료는 없나 확인하고 ‘흑백요리사 우승자 이름이 뭐더라’ 냅다 말아준다. 세 줄 뚝딱 마치고 나니 원래 일어나는 시간이 되었다. 라면밖에 끓일 줄 모르던 나를 김밥까지 쌀 수 있게 키워 준 아내가,,,,,,후아,,,,,고맙다.
점심 시간 친한 선생님이 라면을 들고 어딘가로 가길래 물었더니 다른 선생님이 오늘 아이 소풍이라 김밥을 싸 왔단다. 웃음이 터진다. 나랑 같은 유치원 학부모다. 나는 3줄 싸서 소풍 보냈지만 그 분은 15줄 싸서 학교에 가져오셨으니 그릇의 차이는 나이가 아니라 이런 데서 드러나는구나 겸손해진다.
오늘 저녁도 김밥이다. 남은 재료가 있어서 어쩔 수 없다. 메뉴 고민을 안 해도 되니 좋다. 아마 아이는 오늘 소풍 이야기를 재잘대겠지. 많이 물어봐야겠다. 누구랑 놀았는지. 뭐가 재밌었는지. 그리고 김밥은 무슨 맛이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