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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주은 Jan 24. 2024

버라이어티 논술쌤 생활 3

늑대 아이


1월 1일마다 오는 문자.

"선생님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참 짪은 한 문장, 그러나 꾸준히 오는 문자!

추석, 설날, 생일. 뭔가 특별한 날이 되면 시크한 문자 한 줄이 온다. 말랑말랑한 문장은 아니지만, 12시가 딱 지나자마자 어김없이 찾아오는 인사가 참 고맙다.

너의 모든 날에 축복이 깃들기를.



그러나,

이 아이는(사실, 지금은 나보다도 큰 직업군인아저씨가 됐지만)

정말 오랫동안 나의 심장을 쪼그라들게 했던 아이다.


논술강사로 현장에 뛰어든지 얼마 안 된 초창기 시절, 지금처럼 다양한 학생을 만나보지 못했던 풋내기 논술쌤인 나에게 늑대같은 아이가 나타났다. 바로 기정이(가명)!

우리 기정이.


엄마에게 끌려와

논술학원에 억지로 등록한 기정이는 글을 쓰라고 하면 "하주은 1818"을 가득 써냈다. 교재 여백에도 가득 쓰여진 하주은 1818. 그러면 나는 기정이가 써놓은 하주은 1818을 소리내어 읽었다. 오늘 기정이가 쓴 글은 하주은 1818이라고. 그러면 기정이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고, 아이들은 함바탕 웃고는 하였다.

어느 날,

수업 도중, 기정이의 단짝(둘은 아기 때부터 옆집에 살며 자칭 단짝이라 말하는 그런 친구다) 동근(가명)이가 물어보지 않고 기정이의 지우개를 썼다. 그 순간, 시작된 늑대의 시간.

기정인 갑자기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르더니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동근이도 당황했다.

"자~  여기" 하며 동근이가 지우개를 주었지만 이미 기정이의 분노는 극에 달한 상태. 동근이에게 받은 지우개를 칼로 조각조각내어 동근이의 얼굴에 뿌려버린 거다.

순간 교실의 분위기는 그야 말로 얼음.

누구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고, 오로지 기정이의 씩씩거림만 가득한 실내. 순간의 정적, 그리고 동근이의 울음소리! 한명의 3학년짜리 머스마는 대성통곡, 한명의 머스마는 늑대로 변신, 나머지 아이들은 기정이가 무슨 일을 저지를까 불안으로 한껏 숨죽여 떨고 있는 고양이들이되었다.


그 순간, 나는 정신을 차려야했지만 기정인 이미 커터칼을 손에 들고있었다. 두려웠다.

불과 얼마전에도 분노조절이 안 되는 6학년 남학생을 잡고 있다가 풀어달라며 내 손등의 살점을 뜯어간 일까지 있던 터였다. 다른 아이를 향한 공격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체육선생님이 오실 때까지 그 아이를 꼭 잡아야만 했다. 손등에선 피가 흘렀다. 사람의 손톱으로 그렇게 살점을 뜯어낼 수 있다니!

"이래도 안 놓을 거야?" 하며 계속하는 가운데 체육선생님이 달려왔고 그 아이를 힘으로 제압하여 데리고 갔다. 이제 나의 힘으로는 초등 고학년 남자아이를 어찌할 도리가 없다. 힘으론 이길 수 없다.

그런데 이번엔 커터칼이라니!

모공이 송연하다. 아직 손등도 다 안 나았는데.



그 순간,

저 입 속에서 나도 모르게 나온 소리!

"기정이! 공부할거면 다시 앉고, 안 할 거면 나가. 니가 만난 다른 선생님은 어땠는지 몰라도, 나는 절대 너를 포기 안 할거고, 그래서 봐주지 않고 야단칠거야. 절대로 그냥 안 넘어갈거야."

아이는 진짜 나가버렸다. 속으로 겁이 더럭 났다. 밖에 나가 사고치멱 어떡하지,  나가라는 소리는 대체 왜 했어!

그래도 수업은 해야했다. 이 사실을 짧게 기정이 어머니께 문자로 알리고, 어찌저찌 수습하여 수업을 끝마쳤다.

그리고 교실 문을 연 순간, 아이들이 순간 멈칫 하고 문을 나서지 못했다. 기정이가 문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너 왜 여깄어? 안 가고?"

"엄마가 다시 쌤한테 가래요. 죽어도 쌤한테 가서 죽으래요."

다시 순한 아이가 되어 삐죽이는 기정이. 그 말에

순간 아이들은 일제히 까르르 웃었다.

아이들이 다 가고 기정이와 단둘이 이야기를 조금 나누었다.

"쌤같은 쌤은 처음이라고요! 다 포기했는데, 엄마도, 쌤들도 다 포기했다고 하는데, 쌤은 왜 포기 안한대요?"

가슴에서 뭔가가 차올랐다. 그 아이는 '나가'라는 말이 아닌, '포기하지 않을 거야'를 들은 거다. '야단'을 듣지 않고, '야단의 이유'를 들은 거다. 개떡 같이 말했는데 찰떡같이 알아듣는 기정이. 이 어찌 예쁘지 않을 수가 있는가!


그날 이후, 기정이는 변했다. 여전히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었지만, 이글거리는 눈을 나에게 맞추고, 주먹을 꽉 쥐고, 한동안 있다가 다시 돌아왔다. 다시 교실밖으로는 나가지 않고.

그 사이, 그렇게 기정이가 차오르는 분노와 싸우는 동안 친구들은 기다려주었다. 다시 기정이로 돌아오면 또 반가이, 아무렇지 않게 친구가 되어주는 아이들. 정말 천사같은 아이들이다.

그렇게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자 기정이는 멋진 군인이 되었다. 고교시절, "너 대학 안 갈거야?" 그러면, "에이, 쌤~ 제가 공부는 영 아닌 거 아시잖아요. 울 엄마만 몰라요. 저는 몸쓰는 게 맞아요." 그렇게 능글거리며 대꾸하는 아이. 저 앞가림 척척하며 멋지게 군인시험에 합격하여 자기 길을 찾아간 아이가 되었다.

그 아이를 생각만해도 웃음이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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