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 10년, 서른다섯, 퇴사
브런치북의 이름을 <청년 백수>라고 지었습니다. '청년 백서'였다면 참 멋졌을 텐데……라는 생각이 잠깐 스칩니다. 든든한 어른이 되어 청년들에게 도움이나 귀감이 될 만한 정보를 전달 해주는 것도 좋겠죠. 하지만 30대 중반에 백수가 된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요. 그것보다 조금 더 우울하고 거칩니다. 하지만 단단하고요. 이 시대 모든 '쉼(休)' 인구에게 인사하고 시작하겠습니다. 굿 초이스!
10년 하던 일을 때려치웠다. 오래 일한 만큼 굉장히 많은 사람과 작별 인사를 했다. 퇴사 의사를 밝히고 정식 퇴사하기까지 한 달이 걸렸는데, 그 시간은 대부분 인사 다니는 데 썼던 것 같다. 퇴사 소식을 전하면 돌아오는 질문은 백이면 백 같았다.
"퇴사하고 뭐할 건데?"
현실적인 이야기들이었다. 퇴사하고 뭘 할 계획인지, 그 계획이 얼마나 짱짱한지, 당장 퇴사해도 될 정도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지 등등. 그들은 보통 내가 더 좋은 회사에 이직하거나, 자격증 시험을 치를 예정이거나, 임신을 준비하고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모두 틀렸다. 내 대답도 늘 같았다.
"아무 계획 없어요."
뭐?! 계획 없이 회사를 관둔다는 건 여러 사람들의 입을 벌어지게 할 일이었다. 그리고 뒤따라오는 조언이나 걱정도 대부분 비슷했다. 그래도 괜찮겠어? 나중에 후회해. 일단 휴직을 해보고 나중에 정 안 되겠으면 퇴사해. 남편은 뭐래? 등등. 조언을 가장한 비하도 있었다.
"너 이제 나이가 많아서, 돌아오면 받아주는 회사도 없을걸?"
나의 퇴사를 극구 말리던 어느 상사가 한 말이었다. 서른다섯, 누군가가 보기엔 두 번의 기회는 없을 나이였다. 하지만 당시 나는 '앞으로의 일'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나는 그때 정말로 퇴사 말고는 아무런 선택지가 없었다. 내가 그간 쌓았던 경력을 단숨에 포기한 이유는 깊은 우울 때문이었다.
작년 하반기부터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며 우울감이 커지기 시작했다. 일터에서 겪은 배신감, 모멸감, 무력감 등이 내 안의 우울을 키우더니 나중엔 이곳저곳에서 덩어리져 마침내 나를 뒤덮었다. 올 초에는 매일 자기 전에 빌었다. 다음 날 눈을 뜨지 못하게 해달라고.
겉으로 보기에 나는 아주 멀쩡했다. 외향적으로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다양한 일을 했다. 에너지가 넘쳐 보였고 관심사도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내게 기대고 의지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웠고 그 누구에게도 위안을 얻지 못했다.
나의 진심이 통하지 않고, 원하는 일은 풀리지 않고, 너무 바빠 스스로를 돌볼 시간이 없었다.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회식을 했고 나는 모든 자리에 성실히 참여했다. 늘 피로했다. 누가 하이힐을 신고 내 위로 올라가 잘근잘근 밟는 것처럼 온몸이 아렸다. 아이 따가워.
일터에선 이야기도 잘하고 적극적으로 굴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우울이라는 감옥에 스스로 들어가 나를 가뒀다. 말도 잘 하지 않았고 무언가를 기억하려는 의지도 사라졌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에게조차 쓸 마음이 없어졌다. 나는 여기저기서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지지 않고 스스로 소금을 뿌렸다.
2025년의 시작은 내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그저, 시간이 가는구나. 나는 계속 살아있구나. 인생은 지겹게도 흐르는구나. 하며 어디 마음대로 끌 수 있는 전원 버튼 없나? 하고 억지로 살아냈다. 이런 우울감을 안은 채 수개월이 흐르자, 고장이 났다.
스스로 고치기 위해 노력했다. 심리 상담도 받고, 여행도 다녔다. 가족들이 나를 살리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나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매일 돌연사하는 상상을 하고, 유서를 쓰고, 악몽에 시달렸다. 체중도 걷잡을 수 없이 늘어 거대해졌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스스로가 미워 견딜 수가 없어졌다.
푹 자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났다. 그러면서도 맡은 일은 꾸역꾸역 잘했다. 관성처럼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회사 선배와 마주쳤다. 그 선배가 내게 말했다.
"난 너만 보면 너무 행복해."
"왜요?"
"네가 너무 열심히 일하고, 그 모습이 즐거워 보여서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져!"
그때 나는 깨달았다.
아, 나는 할 만큼 했구나!
그리고 다음 날, 나는 남편과 깊이 상의한 끝에 퇴사를 결정했다. 나의 결정에 가족들은 말했다.
"정말 잘 생각했어!"
그렇게 나의 백수 라이프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