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무음 설정 해놓기
퇴사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핸드폰 설정 바꾸기였다. 모든 앱의 알림을 끄고, 문자메시지와 전화는 무음으로 설정했다. 일을 할 때는 강박적으로 핸드폰을 갖고 다녔다. 집에서 화장실에 갈 때도, 휴가 때도, 병원에서도. 최대한 빨리 연락을 받는 게 직장인의 기본자세라고 생각했다.
업무 연락은 하루 종일 끊이지 않았고, 회사 단체 채팅방도 지나치게 많이 생겼다. 프로젝트성으로 생기는 단체 채팅방뿐만 아니라 밥이나 한 끼 먹자며, 술이나 한잔하자며 갑자기 초대를 해오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소통의 반경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제대로 된 소통이 이뤄지지 않았다.
퇴사 후엔 일적으로 그 어떤 연락을 주고받지 않아도 되었고, 억지로 끌고 가는 인간관계도 그만둘 수 있었다. 핸드폰 무음 설정을 한 뒤로 체중의 절반이 줄어든 기분이었다. 발목에 매어 놓은 두툼한 모래주머니를 훌훌 풀어버린 것처럼 어디든 내키는 대로 힘차게 뛰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반드시 연락해야 할 사람이 없고,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채팅방이 없고, 의무적으로 핸드폰을 쥐고 있지 않아도 된다니. 나와 멀찍이 떨어져 있는 잠잠한 핸드폰이 어찌나 귀여운지! 마음이 가벼워졌다.
아예 핸드폰을 없애버리고 싶기도 했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필터링 없이 도파민을 채우고, 남에게 과하게 관심을 갖게 만드는 이 요물...!!! 핸드폰을 멀리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가장 많이 들은 질타(?)는,
"너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전화를 바로 받지 않는 나를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친한 사람에게는 나의 상태를 충분히 설명해서 미리 양해를 구해놓은 상태였고,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적당한 이유를 대며 뒤늦게라도 연락을 했다.
나는 더 이상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안도감이 들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있다는 '콜포비아'(전화 공포증)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남 일 같이 느껴졌는데 어느새 내가 그렇게 되었다. 전화를 거는 것도, 오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정말 가까운 사이가 아닌 경우엔 절대로 전화를 바로 받지 않았다.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창문이라도 활짝 열고 마음의 여유가 생길 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급하게 연락을 나눌 필요가 없었고, 내가 전화를 바로 받지 않는 것을 서운해한다면 그것도 별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연락이 끊이지 않았다. 하루는 너무 많은 연락이 왔다. 퇴사한 줄 모르고 업무 연락을 하거나, 잘 지내는지 안부를 묻거나, 수다나 떨자고 전화가 오기도 했다. 일일이 답을 하다가 하루를 보냈다. 퇴사한 지 꽤 시간이 지났던 시점이었는데도 핸드폰을 붙잡고 있어야 하는 게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결국 핸드폰을 꺼버렸다. 그리곤 거실 한가운데에 누웠다. 여름의 문턱에서 선선한 공기 속 입김처럼 뜨거운 바람이 한 번씩 훅 들어왔다. 집안 창문을 모두 열었다. 벌레 우는 소리, 아이들 떠드는 소리, 이런저런 소음이 어울려 합주를 시작했다.
온몸에 힘을 빼고 그때의 시간과 날씨, 나의 상태에 집중했다.
천천히 호흡을 고르고, 상처받은 기억은 저 뒤편으로 밀어놓고, 후덥지근한 바람 속 여름의 발자국을 따라갔다.
여름이 시작되고 나뭇잎이 울창해지면 그 아래 그늘로 천천히 걸어 다녀야지.
날이 너무 더워지면 에어컨을 틀고 시원한 수박을 잘라 먹을 거야.
가끔은 계곡이나 바다에 가서 깜짝 놀랄 정도로 차가운 물에 발을 담글 거고.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운동을 하고, 해기 지기 전까지 노래도 불러 보자.
내가 앞으로 할 수 있는 아주 소소한 일들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한동안 돈을 벌거나, 업무적으로 성과를 내거나, 인정을 받는 일은 없을 거다. 그게 아쉽고 그리워지는 날도 있을 거다. 하지만 나는 아주 보통의 날, 아주 소소한 행복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 되겠지.
나 스스로 인정하는 행복이 쌓이고, 꽉 찬 마음이 비어서 여유가 생기고, 마침내 에너지가 가득 차서 찰랑일 정도가 되면 그땐 핸드폰 설정을 바꿀 수도 있겠지.
무음에서 진동으로, 진동에서 소리로!
그리고 전화가 온다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여보세요?"
그런 날이 자연스럽게 올 거라고 기대하며, 오늘도 소리 없는 핸드폰을 멀찌감치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