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 루틴
나는 퇴사 후 계획이 없었다. 하지만 단 하나의 마음가짐은 있었다.
'백수지만 백수처럼 살지 말 것!'
직장인은 루틴이 있다. 출퇴근 시간에 맞춰 기본적인 일정을 세팅해놓는다. 기상부터 식사, 취침 시간 등까지. 백수가 되면 꼭 지켜야 할 시간들이 사라지면서 널널하게 지내다가 결국 낮과 밤이 바뀌는 '올빼미족'이 되기 쉽다.
내가 가장 기피하는 바로 그것.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나는 계획 없이 회사를 관두었지만, 영영 일을 쉴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아직 팔팔한 삼십대에 적당히 몸과 마음의 건강을 되찾으면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 게 응당 마땅 고도리 아닌가..!
언제든 일을 시작해도 힘들지 않도록 '직장인의 시간'을 따라 살기로 했다. 대표적인 근무 시간인 '9 to 6'의 삶과 비슷하게. 그것이 바로 백수가 되고 첫 번째 루틴이었다.
나는 철저히 평일과 주말을 구분지었다. 평일엔 오전 7시에 일어나고, 밤 11시엔 잠자리에 드는 게 목표였다. 지인들은 나의 계획을 절반만 믿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늦잠을 자거나, 잠을 이루지 못해 루틴이 깨지기 쉬울 거라고 의심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이 루틴을 어기지 않았다. 물론 잠이 안 와서 뒤척이거나, 새벽에 깨어 뜬 눈으로 밤을 샌 적도 있다. 그래도 다음 날 오전 7시에 무조건 일어났다. 일찍 일어난다는 건 하루를 길게 쓰겠다는 다짐과도 같았다.
기상하면 바로 30분 정도 산책을 했다. 그리고 공복 운동을 한 시간 하고 샤워를 했다. 머리카락을 얼추 말리고 나서도 오전 10시가 안 되었다. 그럼 집 청소를 하고 글을 쓰다가 점심을 만들어 먹었다. 최대한 건강한 음식으로.
점심을 먹고 나선 뒷정리를 하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나선 가방을 챙겨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에선 책을 보거나, 글을 쓰거나, 생각을 정리했다. 어린이부터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가득한 그곳에 있을 때면 괜히 마음이 편안해졌다.
오후 5시쯤 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저녁 준비를 했다. 남편이 퇴근하면 함께 저녁을 먹고 쉬다가, 각자 할 일을 했다. 그리곤 밤 10시쯤 되면 거실에 누워 서로의 일상을 나누었다. 남편은 매일 내게 물었다.
"오늘은 뭐했어?"
다정한 관심. 나는 남편의 질문이 좋았다. 백수에게 특별한 일이랄 게 뭐 있겠느냐만, 수다쟁이인 나로서는 얼마든지 이야기할 게 있었다. 오늘 무슨 책을 읽었고, 누구와 연락을 했고,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에 대해 줄줄 이야기했다. 그러고나면 애정어린 격려가 돌아오고, 우리의 하루가 저문다.
백수가 되고 나선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돈을 벌지 않고, 사회적 지위나 소속도 없다. 누군가 나에게 '퇴사 후 무얼 했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내놓을 것도 없다. 그래도 나는 매일같이 나의 잔을 채웠다.
비록 남들의 잔에 비해 모자라고, 색깔도 없고, 별 볼 일 없을지 모르지만 하루도 빠짐 없이 성실히 잔을 채웠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 스스로는 매일 물을 길러 다녔으니 여태 목말라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거겠지.
그리고 주말은 주말답게 보냈다. 늦잠도 자고, 평일에 먹고 싶었던 자극적인 음식도 먹고, 이곳저곳으로 놀러 다녔다. 평일을 꽉 채워 보냈더니 주말 정도는 비워도 크게 불안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쾌하고 가볍게 느껴졌다.
물론, 그래봤자 지금의 나를 표현한다면 '부지런한 백수' 정도 될까나. 멋도 없고 재미도 없다. 하지만 스스로가 한심하다고 느껴지진 않는다. 나는 매일 나를 키우고 있기 때문에. 부지런히 살고, 건강하게 지내며, 마음을 찌우고 있는 이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하다.
그래서 오늘도 알람을 맞춘다. 어김없이 오전 7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