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를 쌓는 중입니다
(이전 화에 이어서)
나는 요즘 무조건 마스크를 쓴다. 퇴사 직후 덴탈 마스크를 잔뜩 사놓고는 외출할 때마다 쓴다. 올여름, 찌는 무더위에도 마스크를 꼭 챙겼다. 스스로 입을 가린 것은 일종의 선언이었다.
'누구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회사를 관두고 자꾸만 동네에서 아는 사람을 마주쳤다. 정말 신기할 정도로 가는 곳마다 인사를 주고받아야 할 일이 생겼다. 산책을 하다가도, 관람을 하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아는 얼굴을 마주했다. 겉으론 반갑게 인사했지만 괜히 민망하고 쑥스러웠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한낮 기온이 최고 38도까지 올라가는 날씨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마스크를 썼다. 나를 아는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고, 그림자처럼 세상을 등진 채로 소리 없이 지내고 싶었다. 이쯤 되니 남편이 내게 말했다.
"아휴, 누가 보면 연예인인 줄 알겠어!"
마스크를 쓰고 헉헉대는 모습은 내가 봐도 코미디였다. 관자놀이로 줄기차게 흐르는 땀방울과 숨이 차서 마스크를 들었다 내렸다 하는 꼴이 영 별로였다. 아는 사람이 많으면 얼마나 많다고. 사실 나도 불필요한 강박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마스크를 벗지 못했다. 내 마음만 편하다면 마스크든 복면이든 뭘 뒤집어써도 상관없는 거 아닌가? 남한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나는 현관문에 마스크 걸이까지 부착해 놓은 '마스크 걸(Mask girl)'이 되었다.
남편이 대단하다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내렸다. 이 정도쯤이야 뭘. 아주 잠깐 쓰레기를 버리러 나갈 때도 마스크를 꺼내 썼다. 돌아오면 마스크에 땀이 흥건히 묻어 있었는데, 그게 꼭 나의 찌꺼기들 같았다. 내가 털어내지 못한 나의 찌꺼기.
퇴사 후 심리 상담을 받았다.(상담 에피소드는 나중에 따로 쓸 예정이다) 상담사에게 나의 상태를 말할 때도 나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전 요즘 무조건 마스크를 쓰고 다녀요. 새로운 사람을 사귀고 싶지 않고, 타인과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아요. 모든 관계를 피하고 싶어요."
가족들은 이런 나의 상태를 걱정했다. 엄마는 아직도 내게 종종 전화를 걸어 마스크를 벗었냐고 물어보신다. 내가 빨리 마스크를 벗고 다시 세상으로 성큼 뛰어들기를 바라시는 눈치다. 하지만 불효녀는 이 상태를 당분간 유지하고 싶다고 답했다.
상담사도 나의 상태를 우려하는 말을 할 것만 같아서 마음의 준비를 하며 그의 답을 기다렸다. 마스크를 언제부터 썼는지, 언제 벗을 예정인지, 마스크를 쓰면 마음이 얼마나 편한지 등등의 질문이 따라오겠지? 하지만 상담사는 예상과 다른 말을 했다.
"에너지를 모으고 계시군요."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 바로 내가 빌린 답이다.
왜 '마스크걸'이 되었냐고요? 에너지 충전하느라고요!
요즘은 서서히 마스크를 벗고 다닌다. 가끔은 깜빡하고 안 챙길 때도 있고, 귀찮아서 두고 나올 때도 있다. 에너지가 조금 충전됐다는 뜻일까? 물론 그건 나도 모른다. 나를 전부 알려면 더 많이 살아야겠지, 평생 모를 수도 있고.
마스크를 써서 마음이 편할 때도 있고, 마스크를 벗어서 시원할 때도 있다. 그냥 이대로도 좋다. 어차피 나는 지금 백수고, 혼자 시간을 보내고, 누구와 관계를 맺지 않아도 되는 상태이니 냉탕에도 들어가 보고 열탕에도 들어가 봐도 상관없다.
오늘은 마스크를 쓸지라도 내일은 맨얼굴로 나설 수 있는 게 지금의 나다. 오늘 맨얼굴로 나섰다가 내일은 마스크를 쓸 수 있는 것도 나다. 마스크에 묻은 땀방울처럼 나의 찌꺼기들을 잘 털어내는 시기가 됐으면 좋겠다. 백수 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