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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를 가장한 E의 삶이란..

"회원님 I 시죠?" "네."

by 삼십대 제철 일기

바야흐로 MBTI 시대에 살고 있다. 누구든지 처음 만나서 아이스브레이킹을 하다 보면 꼭 나오는 질문이 있다. 빠지면 섭섭할 정도로.


"혹시 MBTI가 어떻게 되세요?"


인간을 총 16개 유형 중 하나로 규정한다는 게 말이 되나 싶지만, 얼추 성향을 파악하기엔 쉬운 지표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외향형(E)과 내향형(I) 점수가 늘 비등비등하게 나오는데, 근소한 차이로 'E'가 높았다.

E(Extroversion)- 자기 외부에 주의 집중. 타인에게 발상, 지식,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에너지를 얻는다. 사교적, 활동적이며 외부 활동에 적극성을 발휘한다. 폭넓은 대인관계를 가지며 글보다는 말로 표현하기를 좋아한다. 경험을 통해 이해한다. (※출처=나무위키)
I(Introversion)- 자기 내부에 주의 집중. 발상, 지식, 감정에 대한 자각의 깊이를 늘려감으로써 에너지를 얻는다. 조용하고 신중하며 내면 활동에 집중력을 발휘한다. 깊이 있는 대인관계를 가지며 말보다는 글로 표현하기를 좋아한다. 이해한 다음 행동한다. (※출처=나무위키)

일할 때는 나를 'E'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고유의 성격이라는 건 없기 때문에 나는 어쩔 땐 외향적이고 싶었고, 어쩔 땐 내향적이고 싶었다. 하지만 일할 때 쓰는 가면은 E가 맞았다. '밝고 씩씩하게'가 나의 가면이었다.


퇴사하고 나서 내 꿈을 펼칠 수 있는 곳은 오로지 뿐이었다. 집 안에서 나는 여전히 밝고 씩씩하다. 오히려 해맑게 까부는 편에 더 가깝다. 하지만 일단 집을 나서면 완벽한 'I'로 변신했다.


오전에 동네 행정복지센터에서 새로운 운동을 배우기 시작했다. 10명 정도 되는 그룹에서 함께 운동을 배웠는데, 일찍 다니는 나는 항상 먼저 가서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혹시라도 누가 말을 걸까 봐 문 쪽을 등지고 서 있거나, 스트레칭 삼매경에 빠져 있곤 했다.


운동을 하고 나서는 제일 먼저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사람에게 그 어떤 에너지도 쓰고 싶지 않았고, 어차피 에너지 잔량도 바닥이었다. 누군가 말을 걸어오면 친절히 답했지만, 내가 먼저 말을 걸거나 대화를 계속 이어가진 않았다.


그렇게 하다 보니 내가 들르는 집단마다 알고 지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운동을 두 곳에서 했는데, 함께 하는 이들의 얼굴조차 몰랐다. 남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원하는 것도 없었다. 불편한 게 있어도 참았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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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나의 생활이 만족스러웠다. 오래 볼 사이가 아니었고, 서로에 대해 몰라도 되고, 불필요한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되는 인간관계가 너무 편하고 산뜻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점점 더 혼자가 편해졌다. 혼자 있을 때야말로 가장 나다워지는 기분이었다.


어느 날, 집단 운동을 하는 도중에 강사가 수강생들에게 MBTI를 물었다. 내 차례가 되자, 강사가 먼저 말했다.


"회원님은 I 시죠?"


확신에 가득 찬 눈빛이었다.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씩 웃었다. 나도 같이 웃었다. 무언가 나를 옭아매던 것들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진 기분이었다. 억지로 힘을 내지 않아도 되고, 구태여 씩씩하게 굴지 않아도 되는 지금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최대한 사람들을 피하며,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다 보면 문득 웃음이 날 때가 있다. '꼭 이중인격 같잖아?' 나는 앞에 서는 걸 무서워하지 않고, 관심받는 것도 좋아하고, 여러 사람 속에 섞여 있을 때 활기를 찾곤 했다. 늘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게 살고 싶었다. 그게 나의 이상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퇴사 후 정반대의 생활을 하면서 오히려 평온을 느끼고 있다. 하루 종일 아무도 만나지 않고, 나만의 공간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조용히 지내는 일상에서 나를 깊이 들여다본다. 이게 진짜 나의 모습인지, 이게 가면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가끔은 친구들을 만나 왁자지껄하게 놀고 싶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을 알아가며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디디고 싶기도 하다. 다시 정신없이 일하고, 돈을 벌고, 아주 잠깐의 휴식에 아쉬워했던 직장인의 삶도 놓치지 않고 싶다. 언젠가 돌아가야 하므로.


다시 일터로 돌아가면, 나는 또 어떤 가면을 쓰게 될까?

스스로 답을 모르는 질문을 던지며 오늘도 주섬주섬 가면을 쓰고 밖으로 나선다. 그리고 밖으로 나갈 때는……. (다음화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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