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어 보이네요!

서울, 夢. 20화

by 노창범

마흔이 되던 해 8년 동안 다녔던 A사를 그만뒀다. 번아웃을 불러온 에이젼시가 지긋지긋해 마케터로 희망 업종을 바꾸고 낯선 회사들에 지원했다. 하지만 넘치는 자신감과 달리 내가 쌓아온 경력은 내가 마케터임을 증명해 주지 못했다.


결국 겸허해진 난 퇴사 후 3개월이 지나 다시 웹에이전시, 그것도 경쟁사였던 곳에 입사했다.

이곳에서 맡은 일은 제안 업무였다. 이전 회사에서 제안은 팀원들과 함께하는 협업이었다면 여기선 부장 한 명이 혼자 두세 개의 제안을 동시에 진행하는 원맨쇼 방식이었다.


그즈음 난 이 꿈을 꿨다.



[2016년 12월 19일]


한 모임에 참석했다.


난 비딩, 즉 프로젝트 수주를 위한 경쟁 PT라 생각하고 그곳에 갔다.

하지만 도착해 보니 분위기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카페? 아니, 갤러리 같기도 했다. 벽에는 포스터들이 걸려 있었고, 사람들은 캐주얼한 옷을 입고 있었다.


누군가 말했다.


"A사 모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내가 이직 전 다녔던 회사였다.


한 젊은 여성이 다가왔다.

스물대여섯쯤 되어 보였다. 청바지에 흰 셔츠. 밝은 표정.


"처음이세요?"

"아뇨. 내가 있던 곳이에요."

"저는 처음이에요."


우리는 구석 테이블에 앉았다. 그녀는 여러 이야기를 했다. 파주에 작업실을 얻고 싶고 전원생활을 하며 디자인을 하고 싶다고 했다. 창밖으로는 숲이 내려다 보이는 곳을 바란다고 했다.

파주에는 A사의 본사가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아직 선택의 자유가 남아 있는 그녀가 부러웠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A사 전현직 멤버들이라고 했다. 젊은 얼굴들. 디자이너, 기획자, 개발자.

그들 사이를 나도 아는 얼굴이 있었다. A사의 창업주였다. 다들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그가 내게 다가와 엽서 두 장을 건넸다.


"다 쓰기 전까진 못 가요."

"누구에게, 뭐라고 써야 하는데요?"

"한 장은 낯선 멤버에게. 한 장은 나에게."



첫 번째 엽서를 썼다.


'낯선 멤버' 목록에서 이름을 하나 골랐다. 산악 클라이밍 스포츠를 한다고 적혀 있었다. 여자였다.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몰랐다.


'안녕하세요. 에너지 넘치는 프로필을 보고 선택했습니다. 언젠가 함께 일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다 쓰고 보니 구구절절해 보여서 지우고 다시 썼다.


'반갑습니다. 좋은 작업 많이 하세요.'


건조했다. 하지만 이게 나았다.



두 번째 엽서는 더 어려웠다.


창업주에게. 뭐라고 써야 할까.


'예전에 당신의 회사에서 일했습니다. 다시 그 일을 하고 싶습니다.'


너무 직접적이었다. 지웠다.


'좋은 모임이네요. 다음에 또 올 수 있을까요?'


이것도 아니었다.


결국 이렇게 썼다.


'오늘 너무 좋았어'요오로'~ 다음에도 불러주세요!'



'요오로'라는 종결 어미는 지금 젊은 사람들에게서 유행하고 있다고, 꿈속의 나는 알고 있었다.


'내 나이에 맞나?'


생각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뭐, 젊어 보이고 장난스럽고 좋잖아.'



설레는 마음으로 엽서를 제출했다.


동석한 젊은 여성이 다시 말을 걸었다.


"저기, 혹시 파주 쪽 잘 아세요?"

"예, 조금."

"거기 작업실 구하려고요. 좋을 것 같지 않아요?"

"좋을 것 같아요."

"선배님도 그런 거 생각해 보셨어요? 이렇게 사는 거 말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누군가 지나가며 말했다.


"나이 들어 보이시네요!"


농담처럼 웃으며 던진 말이었다. 하지만 귓가에 오래 남았다.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거울을 봤다.


거울 속에 낯선 내 얼굴이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늙었을까. 주름. 처진 눈꺼풀.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거울 속에서 A사 멤버들이 웃고 떠들고 있었다.


그 소리가 점점 멀어지며 나는 꿈에서 깼다.




원맨쇼를 하는 제안서 공장은 7개월을 근무하고 나와 마케터로서 새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몇 년 뒤, 난 다시 A사로 재입사를 하게 된다.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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