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마음이 숨 쉴 수 있는 이곳에서.
2주 전 <방이동, '산책' 큐레이터> 이후로, 처음으로 연재에 제동이 걸려버렸다. 갑작스러운 부산 출장과 그 공백으로 인해 밀려버린 각 수업들을 쫓아가느라 글쓰기가 후순위로 밀려버린 것이었다. 동시에 글문이 막힌 것도 한몫했다. 자칭, 산책 큐레이터라고 해 놓고 정작 눈앞에 쌓인 일들을 해결하기에도 버거운 시간을 보내며, 아이처럼 칭얼거릴 여유조차 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가 버렸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번 글을 이어감과 동시에, 잠시 흐트러진 일상의 호흡을 가다듬는 글을 써 보기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고민 끝에 다시금 연재를 위한 동력을 생산할 수 있는 이야기는 다름 아닌 '방이동을 소개해 보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 글을 쓰는 가장 근원적인 이유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저 "이곳에서 태어났으니 살고 있지!"라는 뻔한 대답보다, 또 달리 선택지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이곳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고향을 떠나 선택한 수많은 동네 중에서도 이곳을 선택하게 결정적인 된 이유.
<방이동, '산책' 큐레이터 中 일부 발췌>
결국 오늘의 이야기는 지난번 글. '마지막 두줄'의 연결 편인 셈이다.
스며들 듯 빠져든 순간
이사를 하고 반년 정도 지났을 때였을까. 하루는 올림픽 공원을 산책 후 숨을 고르던 중,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 서울에서 삶을 이어가야 한다면, 그래서 한 곳을 정착지로 삼는다면 어디가 좋을까?"
고향이든 아니든, 한국이든 외국이든 혹은 거처 없이 떠도는 여행객일지라도 매 순간 머물 곳은 필요하니까, 어쩌면 피할 수 없는 고민 중 하나였다. 그렇게 또다시 깊은 생각에 잠길 때쯤, 넓은 잔디밭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 특유의 '까르르' 하는 웃음소리가 잠시나마 고단했던 마음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것 같았다. 사회에서 갈고 닦여진 웃음이 아닌 순수함으로 채워진 찐 웃음. 그 순간 알 것만 같았다. "그래, 이곳이면 좋겠다!"
왜냐고, 묻는다면?
하나로 설명되지 않는 이유들에 순위를 매기자면,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집 근처 공원'이었다. 그것도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념하여 조성된 이 공간의 유산적 가치와, 다양한 행사로 가득한 이곳은 삶의 만족도를 높이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이는 역세권이 주는 편의성과는 다른 것이었다.
특히 글 쓰기를 미래의 업으로 생각하는 나에게 공간이 주는 분위기는 중요했다. 오히려 역세권이 주는 편의성이나 화려함은 생각이 정체되기에 최적화된 환경이라고 여겨지기에.
방이 '전통' 시장
게다가 걸어서 1~2분 거리에 위치한 방이 전통 시장이 주는 동적인 분위기는 적막한 집을 벗어나 갇혀 있는 마음에 산소 호흡기 같은 역할을 해 주었다. (여담이지만 해외여행을 가면 반드시 들리는 곳이 그 지역의 전통 시장일 정도로 시장이 주는 분위기를 좋아하기도 한다.)
석촌 호수
또한 마음에 고독함이 찾아들 때,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나의 장소는 석촌호수. 벚꽃이 수려한 4월도 아름답지만, 지난해 겨울 '첫눈이 내리는 날 아침 일찍 달려가서 그 누구의 흔적도 닿지 않은, 오롯이 눈으로만 쌓인 길에 발자국을 남겼을 때, 한 해 동안 누적된 마음의 피로가 한순간에 말끔하게 눈 녹듯 녹아버렸다.
특히 눈을 밟으면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소리. 저 멀리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거위들. 샛노란 부리가 아니었으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하얀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했던 내 마음을 순백으로 채워주기 충분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올해도 첫눈이 내리면, 그 누구보다 먼저 호수에 다 다를 것이라고." 그리고 한 해 동안 쌓인 묵은 마음의 찌꺼기를 하얀 눈이 녹을 때 함께 쓸려 내 보내겠노라고.
방이 먹자골목과 롯데월드 타워 사이
그러다 가끔 쓸쓸함이 밀려올 때는 청춘들의 열기와 직장인들의 애환이 뒤섞인 방이 먹자골목을 걸으면서 흐려진 마음을 달래 본다.
동시에 외식산업에 종사하고 있기에, 트렌드의 변화를 파악하기에도 좋으니 1석 2조가 따로 없다. 게다가 길만 건너면 연결되는 롯데몰은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가끔 "이곳이 서울에서 가장 중심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만큼 말이다.
롯데월드 타워를 볼 때마다 '다짐하는 이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마천루. 누군가에게는 처음 방문하는 여행지이고, 사진 찍기 좋은 명소겠지만 내게는 어느새 지나는 길에 보이는 수많은 건물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별 다른 감흥 없이 지나가곤 했지만 언제부턴가 이곳을 쳐다보면서 새로운 목표를 정했다.
"내가, 저곳에 '살(住) 일'은 없겠지만, '살(買) 수' 있는 사람은 되겠노라고"
어느 순간, 방이동은 내게 그런 역할을 해 준 듯하다. 오늘 하루 힘낼 수 있는 연료를 가득 채워 '걷고 (글을)쓰는 힘을 보충해 주고, 우울했던 시간 속에서도 희망의 의지'를 놓지 않을 수 있던 이유였다. 가족이라는 존재 외에도 나를 버티게 해 주었던 이유는 늘 곁에 있었기에 인지조차 못 했던 '내가 숨 쉬고 있는 이곳'이라는 것을.
대한민국 NO.1 아산 병원
하루는 대구에 사는 지인이 제수씨와 병원 진료를 위해서, 서울에 온 김에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제약업계에서 오랜 시간 근무해 온 지인은 "서울은 살기 싫지만 병원만큼은 서울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결코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래서 당장은 아니어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병원이 차로 10분 거리에 있다는 사실은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해외 봉사활동 때 의료진으로 알게 된 형님이 현재 아산 병원에서 근무를 하고 계셔서 더욱 든든하다) 언젠가는 '갈 일..?'이 생기지 않을까?
다른 성격을 가진 공간들의 교집합
글을 마무리하던 중 문득 어릴 적 즐겨봤던 '한 지붕 세 가족'이라는 드라마가 떠 올랐다. 서울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그 시절 따뜻함이 묻어나는 가족 드라마였는데, 어쩌면 나에게 방이동이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과 같은 온도는 아닐지라도 한 동네 다양한 공간의 교집합은 어느덧 내게 위로와 극복의 공간이 된 듯하다.
P.S. 집 근처 카페에서
마지막으로 현재 이 글을 쓰고 있는 집 근처 카페를 빼먹을 뻔했다. 커피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글을 쓸 때 공간이 미치는 영향을 많이 받기에, 지금 이 카페에서 정말 많은 글들을 세상 밖으로 내 보낼 수 있었다.
오늘 아침도 사장님은 무뚝뚝하게 로스팅을 하고 계시지만 아무렴 괜찮다. 그의 손을 거친 생두는 어느새 향긋한 원두의 향기를 뿜어낸다. 이는 소금빵집에서 새어 나오는 버터 향만큼 진했고, 귀에 익지만 이름 모를 음악은 오롯이 글쓰기에 몰입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내 몸에 모든 오감을 깨워주는 산미 가득한 커피 한 모금까지.
한때는 한평생 부산을 벗어날 일 없이 살아갈 줄 알았고, 올림픽공원은 가끔 뉴스에서나 보던 나에게, 이곳이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터전이 될 줄은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게 인생이라면 난 받아들일 준비가 된 듯하다. 감히 내가 귀인이라고 부르고 싶은 대표님의 제안. 어쩌면 그 제안을 수락한 순간부터 바뀌어버린 내 삶은 항상 행복만을 가져다 주진 않았지만, 굴곡이 있었기에 글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때 그 제안에 '아니요'라고 답 했다면? 이 글 또한 세상에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현재는 과거에 '포기와 선택'이라는 두 갈래 중 '더 나은 선택'이라는 갈래로 시작된 최종 결과물이니까" 그렇기에 삶의 굴곡 뒤에 맺은 인연은 내게 필연적인 귀인이기에, 때로는 인연의 시작점에 점을 찍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깊이 감사하며 살아가게 된다.
여행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이 그러했듯.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누군가는 평행선을 또 다른 누군가는 곡선의 길을 가면서 점점 그 관계는 희미해지기 마련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심을 담아 쓴 이 글이 언젠가는 전달되길 소망하며 이 글을 마무리해 본다. 더불어 브런치라는 새로운 時공간을 통해서 만난, 무엇보다 같은 작가라서 더욱 특별했던 새로운 귀인분에게도.
오늘은 생각이 아닌 마음을 적다 보니, 평소보다 글의 분량이 2배 가까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깊은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 Taiwan Jacks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