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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 Nov 23. 2020

나의 첫 번째 서울 메이트

마지막 편지

“우리 꼭 서울에서 살자”


우리의 공통 관심사는 서울과 덕질이었다. 고교 동창인 S와 나는 20대 초반, 뒤늦게 덕질에 눈을 떴다.

대학생이 된 우리는 덕질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서울에 상경하지 못한 것을 몹시 슬퍼했다.


좋아하는 가수는 달랐지만 ‘덕심’은 우리를 끈끈하게 만들었다. 내가 개떡같이 말해도 S는 찰떡같이 알아듣곤 고개를 끄덕거렸다.


S와 나는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교를 다녔다. 대학생이 된 이후에는 그리 자주 만나진 못했다. 가끔 동네 카페에서 만나는 날이면 덕질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늘 ‘기승전덕질’.


요즘 유난히 그때가 그립다. 아직 현덕(나름 휴덕이라고 생각하지만)인 나는 누군가와 덕질 이야기를 마음껏 하고 싶은데 그럴 사람이 몇 없다. 현생이 바빠서 떠난 이들이 대부분이다. S와 쉼 없이 이야기하던 그때로 딱 한 번만이라도 돌아가고 싶다.


20대 초중반쯤, S는 꿈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다 새로운 길을 택했다. 요식업에 뛰어든 S는 가게의 점장이 돼서 ‘덕질의 요지’ 서울에 입성했다. 꽤 파격적인 행보였다. 아직도 그의 용기가 놀랍다.


그 당시 나 역시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활기가 넘쳤다. ‘일단 서울에 올라가기’가 삶의 목표였다. (전 재산 150만 원으로 무작정 올라갈 수 있는 무모함과 용기를 심어 준 친구가 바로 S다. 정작 내가 서울에 가겠다고 했을 때 반대하긴 했다)


처음 서울에 올라갔을 때, 아는 친구라곤 S 뿐이었다. S는 나의 첫 덕질 메이트이자 첫 서울 메이트다. 그리고 나의 구원자였다.


모든 게 낯설었던 서울에서 S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S는 심적으로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나에게 큰 도움을 줬다. S 덕분에 나는 서울에서 굶어 죽지 않았다. 서울이 덜 추웠고 덜 갑갑했다.


두 번째 회사에서 열정 페이를 받으며 버텼던 나는 S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소위 ‘땜빵’으로 투잡을 뛰었다. S는 벌이가 변변치 못했던 나에게 돈을 아끼지 않았다(S 역시 자취를 했었는데, 나에게 어떻게 그렇게 베풀 수 있었을까 싶다.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S가 없는 서울 살이는 어땠을까. 상상하기 조차 싫다.


우리는 주로 주말에 만났다. 점장과 아르바이트 생으로. 매장에서 각자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틀어놓고, 힘들어도 으쌰 으쌰 했다. 덕후라면 다 알 거다. 우연히 흘러나오는 최애가 부른 노래 하나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S가 힘들어할 때면 나는 S의 최애 노래를 찾아틀었다.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면 S의 일그러졌던 표정이 잠시 풀렸다. S의 그 눈웃음이 나는 참 좋았다. 덩달아 웃게 만드는 그 눈웃음.


나름 월급다운 월급(?)을 받게 된 후 더 이상 투잡도 뛰지 않았다. 그러면서 S와 만나는 횟수도 점점 줄었다.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하루하루가 미친 듯이 바빴다. 그때 난 20대 암흑기를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S와는 서서히 멀어져 갔다. 간간이 만났지만 예전 같진 않았다. 서로에게 많이 소홀 해졌다.(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만 S에게 소홀했던 것 같다)

그러다 S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마지막 대화에서 S는 몸이 좋지 않아서 다시 고향으로 내려간다고 말했다. S는 집을 정리하면서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가져가라고 연락을 했다. 당시 나는 S의 호의를 무시했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S가 서울을 떠난다고 했는데도 작별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리고, 1-2년 정도 연락이 안 닿았을 때는 ‘얘가 나를 싫어하나? 나와 인연을 끊고 싫어서 이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S를 원망했다.


S의 또 다른 친구로부터 S의 근황을 알게 됐다. 곧바로 S를 만나러 고향으로 내려갔다. S와 다시 마주한 곳은 호스피스 병동이었다.


마음이 무너졌다. 후회했고, 미안했고, S를 원망한 내가 미친 듯이 싫었다. 눈물만 자꾸 흘렀다. 우리는 짧은 대화를 나눴다. S는 그 순간에도 나를 걱정했다. 서울에서 망가진 나의 몸과 마음을 진심으로 염려했다.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몇 번 카톡으로 대화를 나눴다. S의 블로그도 알게 됐다. 그간 S는 블로그에 일기를 썼다. 뒤늦게 S의 일기를 훔쳐보며 마음이 아파 혼자 꺼억꺼억 울었다.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S의 마지막 신호를 알아채지 못했다. 왜 자세히 묻지 않았을까. 그때의 나는 무슨 생각으로 살았던 걸까. 후회되는 순간들이 자꾸 떠오른다.


우리에게 다음은 없었다. 부고 전화를 받았다.


무너졌다. 눈물만 하염없이 흘렀다. 믿기지 않았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고향으로 가는 기차 안은 지옥 같았다. 그때 내가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S와 친했던 친구 2명과 함께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낯익은 S의 가족들이 보였다. 그리고 S의 영정 사진이 놓여있었다. 활짝 웃고 있었다. 우리가 좋아했던 S의 눈웃음. 참았던 참으려고 했던 눈물이 터졌다.

우리는 이름만 들었던 S의 친구들과 그곳에서 한참을 함께 울었다.


씁쓸한 마음을 뒤로 한채 우리는 택시를 탔다. 라디오에선 김광진의 ‘편지’가 흘러나왔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그대 부디 잘 지내시오”

노래가 흘러나오는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S가 우리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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