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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후 Feb 10. 2021

평범한 일상이 여행이 된 순간

서울의 시간과 마드리드의 시간

정오의 볕이 들어오는 침대에 누워 노트북을 켠다. 오늘은 늘어지게 누워있다 외출을 할 예정이다.

영화를 틀어놓고 잠시 창가로 시선을 돌린다. 세상은 이미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과 중천에 뜬 해로 분주하다. 나는 내 방의 세상에서 여유로운 오후를 보내본다.



오늘은 마드리드의 현대 미술관에 갈 예정이다. 레알 왕궁 길을 지나 한적한 스페인 광장을 거닐며 나는 미술관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맙소사, 시에스타(스페인의 낮잠 타임)에 걸쳐 미술관의 문은 잠겨 있다. 오늘의 계획이라곤 미술관을 보는 것이 전부였는데 이거 참 운도 없다. 이왕 나왔으니 무라도 뽑아야지! 그렇게 나는 미술관 근처 noviciado 거리를 목적 없이 걷기 시작한다.



단조로운 색의 높은 빌딩이 많은 서울과 달리, 마드리드의 집과 거리는 형형색색이다. 나는 골목골목 발 닿는 데로 걷다가 한 카페를 발견한다. 나는 낯선 그곳으로 들어선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사람들은 자유롭게 책을 읽거나 조용히 대화를 나눈다. 이곳에 이방인이라곤 나뿐인 듯했다. 그럴수록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해방감을 느낀다. 나는 커피 한잔을 시키고 자리에 앉아 책을 꺼낸다.




"삶이 부과하는 문제가 까다로울수록 나는 여행을 더 갈망했다. 그것은 리셋에 대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풀리지 않는 삶의 난제들과 맞서기도 해야겠지만, 가끔은 달아나는 것도 필요하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카페를 나와 또다시 거리를 걷다 작은 과일 가게를 보았다. 마트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신선한 과일들이 잔뜩 있다. 게다가 다양한 과일을 조금씩 골라 살 수 있다. 나는 바나나 두 송이와 체리 한 움큼, 좋아하는 납작 복숭아 무려 여섯 개를 담는다. 과일이 담긴 봉지가 마치 나를 향한 사랑으로 느껴진다. 계획이 틀어져도 예상치 못한 행복들에 웃음이 스멀스멀 나오는 날이다.



스페인 광장으로 걸어가는 길에 영화관발견. 마침 오늘 수요일은 마드리드의 문화가 있는 날로 값싼 가격에 영화를 볼 수 있다. 오늘 하루 마음 가는 대로 지냈으니, 영화도 한 편 봐볼까? 나는 오직 포스터만 보고 한 영화를 골랐다. 나는 티켓을 사고 극장에 들어간다. 놀랍게도 스페인의 영화관은 층이 없다. 평지에 극장 의자가 놓여있어 자신보다 큰 사람이 앞에 앉기라도 하면 화면을 가릴 수도 있다. 다행히 애매한 저녁시간이라 사람은 많지 않다.

나는 알아듣지 못할 스페인어 대사를 배경음악처럼 흘러들었다. 흘러가는 영상만 감상는데도 희한하게 내용이 이해가 갔다. 배우의 표정에서, 관객들이 웃는 타이밍에서, 슬퍼지는 음악에서 나는 영화를 보고 느낀다.


영화관을 나오자 세상은 붉게 물들어 있다. 하루가 또 이렇게 지나간다.

집에 가기 전, 단골 타파스 집에 들러 맥주 한잔을 해야겠다. 이 생소한 행복을 고이 간직한 채 하루를 마쳐야겠다.



생소한 행복.

카페에 가고, 과일을 사고, 영화관을 간 그런 날이었다. 한국에서도 했고, 누구든 할 수 있는 그런 일들. 돌아보면 특별할 것 없는 아주 평범한 하루였다. 하지만 오늘 나는 익숙함보다 생소함을 느낀다. 생소함 속 행복을 느낀다. 이 모든 게 단지 여행이어서 인가. 그보다는 익숙함에 숨어있는 아주 큰 행복을 보았기 때문이다.


행복은 만드는 것일까, 발견하는 것일까?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행복은 발견에 가깝다. 지금 주어진 상황에, 살아가는 순간 속에 내가 발견해야 한다. 현실이 불만족스럽다고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바꾸고, 새로운 행복을 만드는 것은 마음처럼 쉽지 않다. 물론 그 방법도 멋지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좌절감을 느낄 수 있다. 현재의 상황 속에 작은 성취감, 작은 칭찬, 작은 만족감을 발견하다 보면, 삶을 더 이상 불평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행복은 쳇바퀴 굴러가듯 살아가는 익숙한 하루 속에서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 맛있는 점심을 먹은 것에, 날씨가 너무 좋은 것에, 마음에 딱 맞는 음악을 들은 것에, 열심히 일을 하며 하루를 보낸 것에, 친구에게 안부 문자를 받은 것에. 모든 평범함에 사랑과 행복이 숨어있다.


현실을 바꿀 수 없어도, 새로운 행복을 만들 수 없어도, 당신은 지금 행복해야 한다. 여기까지 이 글을 읽은 누군가가 있다면, 함께 오늘의 행복을 하나씩 찾아보자. 나는 나를 다독이며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 더 괜찮은 내일을 살아내고 싶다.



나는 여행이 아니라 삶을 꿈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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