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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어푸 Feb 23. 2021

무기력 때문에 돌아버릴 거 같아서

무작정 걸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흘이었다.

몸을 일으키기까지, 방문을 열고 나가기까지, 세수를 하기까지 작은 기력도 나지 않았다. 정신은 초췌했고, 몸은 중력을 이기지 못했다. 



무기력과 우울은 감기처럼 찾아온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오늘 갑자기 찾아오기도 하고, 특별한 이유를 모르겠는데 아파지기도 한다.


하루는 오후 두 시가 넘어서까지 눈만 뜬 채 누워있었다. 텔레비전을 틀어도 잠만 온다. 졸리지 않은데도 잠이 온다. 눈은 천근같이 무겁다. 몸이 말을 안 듣는다.


힘겹게 몸을 일으켜 욕조에 물을 받았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는데 밖은 어느새 봄이다. 이불을 개키고 책상을 정리한다. 기분이 차츰 나아진다.

다시 욕조 물을 확인하니 물이 얼음장처럼 차다. 보일러를 껐다 켜도 차갑다. 담긴 물을 퍼내고 수도꼭지를 열었다 닫았다 반복한다. 허리를 숙여 물 온도를 계속 확인하지만 물은 여전히 차갑다. 따뜻해지지 않는다.


또다시 우울이다.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울고 싶은 것 같다.

무얼 하는 것조차 감정이 버겁고 머리가 아프다. 물이 아직도 차갑냐는 엄마의 질문에 나는 되려 짜증을 내고 말았다.





오후 네 시,

따스한 햇살이 하루를 넘어가고 있다. 나는 백팩을 메고 집을 나선다. 좋아하는 후드티를 입고, 읽고 싶은 책을 챙기고, 카메라를 들고 무작정 걸었다. 오랜만에 자진해서 나간 외출인 듯하다.


나에게 오후 네 시는 이미 하루가 다 지나서 뭘 해도 늦는 애매한 시간이다. 좀 있으면 배가 고플 것 같고, 카페를 가기엔 돈이 아깝고, 나가면 금세 해가 질 것 같은,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이라 여겼다.


시계가 네 시를 넘어가면 나는 오늘 하루를 돌아보고 기분을 나눈다. 오전이 부지런했다면 오후는 좀 게으르게, 오전이 게을렀다면 오후는 이미 버린 하루 인양 더 볼품없게. 자기 전까지 남은 여덟 시간을 앞전에 보낸 시간들로 결정해 버렸다. 그렇게 하찮게 여기던 오후 네 시, 나는 하루를 시작했다.


바깥에서 본 오후 네 시는 한창 밝았다. 한 시간을 정처 없이 걷고 한 시간을 카페에서 책을 읽은 후에도 여전히 밝을 만큼.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바라본다. 천천히 흘러가는 자연도 느껴본다.


나는 돈과 시간, 거리 등의 합리성만 따지다가 놓친 행복이 많았다. 오늘도 '역시 글렀다'며 내 방에 누워있길 택했다면 나는 이 기분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푸르른 하늘 아래를 걸으며, 청계천을 걸으며, 흘러가는 물을 보며,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며, 난생처음 보는 골목을 걸으며,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나는 나를 어루만진다. 특별할 것 없는 산책이지만, 누워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아지겠지? 나아질 거야.


삶은 일어나는 것부터 시작이다.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단지 시작이었다.

아침이 아니어도 삶은 언제든 시작될 수 있다. 하루를 시작할 용기, 집 밖을 나올 용기, 변화를 시도할 용기라면 충분하다. 내가 원하는 삶으로 나아가고 있을 거라고 자신에게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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