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의 업무 범위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모든 일에는 프로세스가 있습니다. 디자인 또한 큰 프로세스 안에서 클라이언트와 기획자 그리고 디자이너가 각각의 영역을 잘 수행해야 효율적이게 업무를 완료할 수 있습니다. 대학 조별 과제라고 가정해 볼까요? 시장조사를 하여 자료를 수집하는 담당, 수집한 자료를 정리하여 분석하는 담당, 분석된 내용으로 깔끔하게 기획 정리하는 담당, 또 정리된 내용을 발표 자료로 다듬는 담당 등 각각의 포지션이 있습니다. 만약 중간에 누구 하나라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거나 기한을 어기게 된다면 최종 마감일까지 자료를 제출하지 못하게 되어 전체가 패닉 상태에 빠질 수 있게 됩니다. 직장 생활도 다를 바가 없겠죠. 각자 정해진 포지션에서 업무를 진행해야 하는데 누군가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남에게 떠맡기거나 놓치게 된다면 결국 누군가는 자기가 담당도 아닌 일을 처리해야 하고, 시간은 점점 늦춰져서 결국 어떤 결과가 나올지 훤히 보이지 않나요? 아마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대학이나 직장에서 이러한 아찔한 상황을 한 번쯤은 겪어보았을 거라 생각됩니다.
신입시절 디자인을 전혀 해보지 않았던 상사가 저에게 80p나 되는 애뉴얼리포트를 3일 만에 완성하라는 업무를 주었습니다. 도저히 이 일정은 불가능하다고 일주일 정도의 여유를 달라고 하였지만, 상사는 제게 프로젝트 일정은 이미 고객사와 협의하였기 때문에 변경할 수 없고 그냥 3일 만에 디자인 기획과 디자인 작업 및 교정 교열까지 하라는 말만 하였습니다. 결국 동료 디자이너들과 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밤샘을 해가며 3일 만에 80p가 되는 디자인을 완성하였죠. 사실상 이는 너무나 무리한 일정이고, 상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부하직원에게 할 수 있는 업무적 폭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상사가 디자인이라는 게 그냥 디자인만 하는 게 아니라 벤치마킹을 통해 콘셉트 정리도 하고, 디자인 기획을 통해 레이아웃도 구상하고, 이미지 소스를 찾아서 톤 앤 매너를 보정하고, 하나하나 요소를 얹히는 게 얼마나 오래 걸리고 복잡한 작업인지 알았다면 결코 그런 무리한 일정을 강행하진 않았을 겁니다. 프로젝트를 완료하자 그는 “거봐 가능하네”라는 말을 하며 고객사들에게 <다른 회사와 달리 짧은 기간에 디자인할 수 있습니다>라는 이상한 슬로건을 달고 계속적으로 무리한 업무를 가져왔습니다. 결국 동료 디자이너들과 저는 디자이너의 업무 영역과 프로세스를 고려하지 않는 그의 행동에 몸이 상할 대로 상해 퇴사를 결심하였습니다.
혹시 여기서 문제점을 발견하셨나요? 무리한 업무를 시키는 것, 아니면 상사가 고객사에게 이상하게 홍보하는 것? 물론 그것도 맞겠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디자이너의 업무범위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디자이너에게 업무를 지시하는 행동>입니다. 즉 저 상사는 디자이너가 무슨 업무를 하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 업무를 하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상항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서로의 프로세스와 업무영역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하죠. “우리는 디자이너가 기획도 하고, 글도 쓰고, 교정교열도 하고, 코딩도 하고 다해요”라고 하기보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하나의 팀으로 구성되어 시너지를 내고 있습니다”라고 홍보하는 게 어찌 보면 회사 입장에서도 좋은 마케팅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경험해 본 바에 의하면 클라이언트들은 회사에 프로젝트를 의뢰할 때 회사의 규모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보통 그 회사에 업무를 진행할 전문 인력이 있는지도 중요하게 생각을 합니다. 아무리 회사 규모가 좋다 해도 기획자가 글도 쓰고 디자인도 한다면 디자인 퀄리티는 저하될 수밖에 없고, 반대로 디자이너가 디자인도 하고 글도 쓴다면 당연히 기획적으로 엉성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적은 3인 이하 규모의 회사라도 해도 업무 포지션은 정확하게 나누어져야 하고,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정확하게 인지해야 제시간에 퀄리티 높은 결과물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1. 기획과 디자인적 기획의 차이
사실 ‘디자이너는 딱 이만큼만 해야해!’라며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은 확실합니다. 일을 하다 보면 기본적인 문서작업을 할 수도 있고 출장을 가는 등 디자인 외에 다른 업무를 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런 것들을 모두 제외하고 디자인을 할 때만 생각해 본다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바로 디자인 기획과 디자인 작업입니다. 디자인 기획은 앞의 프로세스에서 얘기한 것처럼 디자인을 하기 전 콘셉트 기획 및 아이디어 도출, 시장조사 및 벤치마킹, 초안 스케치 및 레이아웃 구성 등의 업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디자인 작업은 디자인 기획을 통해 나온 내용을 토대로 포토샵을 열고 일러스트를 열고 진짜 디자인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 보면 어떤 내용(기획)을 가지고 어떻게 디자인으로 표현할지 구상(디자인기획)을 한 다음 디자인 작업을 들어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기획과 디자인기획이라는 말이 왠지 모르게 비슷하다는 생각이신가요? 처음 듣는다면 당연히 이 두 가지의 차이점을 크게 못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디자인도 시각디자인, 영상디자인, 인테리어디자인, 건축디자인 등 여러 분야로 나뉘는 것처럼 기획 또한 같은 단어이지만 두 가지의 업무는 아주 확실하게 구분될 수가 있습니다.
2. 기획과 디자인기획, 그 안에서 각자의 역할
1) 기획자의 역할
디자인을 하기 위해서는 내용이 필요하고 누군가는 그 내용을 정리해야 합니다. 그저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것들을 자기가 알아보기 쉽게 대충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알아보고 이해할 수 있게 정리한 뒤 깔끔하게 파일로 만드는 것까지가 기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끔 디자인을 하다 보면 이런 일을 겪습니다. “대충 그려봤는데 이렇게 디자인해 주세요” 건네받은 종이를 들여다보니 도저히 뭐라고 썼는지 알아볼 수도 없는데 그걸 기획안이라고 말하며 디자인 작업을 요구합니다. 사실 그럴 땐 화가 많이 나지만 침착하게 얘기합니다. “오탈자 없는 문서파일로 전달해 주세요” 심지어 글씨 쓰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으니 디자인 작업도 한 두 시간 내에 해달라며 업무 프로세스를 붕괴시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종이에 대충 작성하는 건 기획이라고 하기보다는 그저 <생각 idea>에 가깝습니다. 업무라는 건 나 혼자가 아니라 서로 협업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서도 체계적으로 공유되어야 합니다.
홈페이지 제작을 한다고 가정해 보면, 웹 기획자가 스토리보드를 제작한 뒤 디자이너와 개발자가 그 스토리보드를 기반으로 업무를 진행합니다. 만약 기획자가 스토리보드를 자기만 알아볼 수 있게 작성했다면 그다음 업무를 진행할 사람이 어떤 불편함을 겪을지 안 봐도 느껴질 수 있습니다. 디자인을 하기 위한 raw data(원본, 원고 등의 자료)를 작성하여 상대방과 공유할 수 있는 문서에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는 것이 디자이너와 협업하는 기획자의 역할입니다.
2) 디자이너의 역할
기획은 말 그대로 원본 데이터를 가공하고 정리하는 업무를 하기 때문에 정말 중요한 포지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게 많은 디자이너들이 기획자와 제일 가깝게 소통하고 있죠. 그런데 “기획자가 기획을 하는데 디자이너도 기획을 하나요? 그냥 기획안 대로 바로 디자인을 진행하는 거 아니었나요?”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절대 아니에요. 디자이너도 기획을 합니다”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기획이라는 단어는 같지만 기획자가 하는 기획과 디자이너가 하는 기획은 엄밀히 다르기 때문이죠.
기획에는 정보를 정리/설계/전달하는 기획과 디자인적 콘셉트를 잡는 기획이 있습니다. 이 두 개념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보통 <기획자>가 하고 후자는 <디자이너>가 합니다. 즉 디자이너는 기획적 마인드가 꼭 있어야 하지만 전자의 기획을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해 디자이너는 정보 수집의 기획을 하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적 콘셉트를 도출하는 포지션입니다.
디자이너는 기획안을 전달받은 뒤 시각적 콘셉트를 어떻게 끌고 갈지 벤치마킹을 진행합니다. 그리고 벤치마킹 단계를 통해 나온 자료를 이용해 콘셉트 정리를 합니다. 콘셉트 기획안에서 디자인의 전체 방향성이 한눈에 보여질 수 있도록 키워드나 폰트 및 컬러 요소까지 명확하게 정리합니다. 콘셉트가 확정되면 그 내용을 바탕으로 담당 기획자와 혹은 클라이언트와 소통 및 협의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이후에 디자이너는 포토샵을 키고 디자인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프로그램을 열고, 도큐먼트 사이즈를 제대로 잡고, 기획했던 레이아웃과 컬러 등을 활용하여 시각적으로 표현해 냅니다. 다시 한번 디자인 기획에 대해 천천히 읽어본다면, 앞장에 나왔던 내용들이 그대로 나와있다는 걸 눈치채셨을 겁니다. 디자인을 하기 위한 요소인 [목적과 방향성, 키워드] 그리고 디자인 프로세스에서 언급한 [벤치마킹, 콘셉트 기획, 레이아웃] 등 결국 이 모든 것들은 디자인을 할 때 필수로 알아야 할 내용이고 계속 말해도 부족하지 않을 개념입니다.
디자인을 할 때 항상 작성하는 프로젝트 시트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서로가 해야 할 업무를 정확하게 분담하고 언제까지 그 업무를 완료할지 정리합니다. 그리고 이 내용을 협업하는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문서화합니다. 만약 디자인을 함께하는 동료가 있다면 협업할 때 서로 디자인을 통일할 수 있도록 확실한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합니다. 보통 이렇게 했을 때 업무의 효율성과 결과물의 퀄리티는 확연히 높았습니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클라이언트 혹은 타 팀에서 디자이너의 업무가 아닌 부분까지 맡기며 무리한 요구를 하였을 때는 결과물의 퀄리티가 비교적 낮아졌죠.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걸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바로 다른 사람이 해야 할 업무까지 하다 보니 가장 중요한 디자인 업무에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기획 원고가 실시간으로 수정되느라 하루 종일 오탈자만 체크한 적이 있습니다. 결국 저는 시간이 부족해서 디자인을 급하게 할 수밖에 없었고 다행히 오탈자에 대한 실수는 없었지만 그 결과물은 포트폴리오로는 자랑할 수 없을 정도로 불만족스러웠습니다. 물론 시간이 있고 여유가 된다면 디자이너 또한 추가적인 업무를 해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일정은 정해져있는데 자신이 해야 되지 않을 부분까지 관여하게 된다면 결국 디자이너는 가장 중요한 디자인이 아닌 다른 것들에 집중하게 되어 디자인 퀄리티가 저하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저는 항상 협업자들에게 요청합니다.
“이 부분은 기획자님께서 체크해 주세요”
“이 부분은 고객사가 직접 준비해서 작성해 주세요”
“오탈자 검수는 디자이너가 아닌 상호 체크해야 합니다”
디자인을 시작하기 전에 항상 염두해 두는게 좋습니다. 처음에는 상대에게 요청하는 게 껄끄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간단한 콘텐츠 하나를 디자인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해야 할 역할과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구분해 보고 명확하게 업무를 분담하여 일정을 정리해 보세요. 그리고 혼자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유하고 체계화 시키는 것이죠. 이 문서가 차곡차곡 쌓이면 주먹구구가 아닌 체계적인 업무 시스템이 되고, 향후 큰 프로젝트를 할 때에도 그동안의 경험이 큰 밑거름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