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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Dec 09. 2024

이미륵 평전

정규화 박균

범우

2010년 3월 20일


이미륵의 단편 <이상한 사투리>를 읽고 내쳐 그 작품이 실린 <이미륵 평전>을 읽었다. 그가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쓴 작가라는 것밖에는 아는 게 없었는데 굳이 그의 평전을 찾아 읽은 것은 <이상한 사투리>에 담긴 사람에 대한 이해, 사람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다.


<이상한 사투리>는 작가가 어느 수도원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겪은 자전적 소설이다. 그의 대표작인 <압록강은 흐른다>도 자전적 소설이라는 것을 보면 대체로 그의 작품이 이와 같은 형태를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느 날 수도원에 프랑스군에서 도망 나온 모로코 사람이 나타나자 수도원에서 일하는 젊은 수사는 작가에게 작가의 ‘고향 친구’가 왔다고 전한다. 모로코 사람과 한국 사람은 비슷하지조차 않은데 그저 자기가 알아듣지 못하는 사투리로 이야기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서로가 익숙해지자 젊은 수사는 자기도 수도원 동네 출신이 아니니 자기가 쓰는 말도 사투리이기는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프리카인, 유럽인, 그리고 아시아인. 그렇게 세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창문을 통해 잿빛 수도원 지붕 너머, 그리고 푸른 마인강의 계곡 너머로 지고 있는 저녁놀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말로 소설은 끝난다.


특별히 줄거리랄 것도 없는 짧은 글이지만 읽는 내내 서로 다른 대륙에서 온 사람들을 행색이나 출신이 아니라 그저 ‘알아듣지 못하는 사투리를 쓰는 사람’으로 여기고 서로를 이해해 나가는 모습 때문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행색과 출신에 따라 사람을 나누고 차별하는 것이 일상화된 세상에 던지는 저자의 질문 앞에서 과연 나는 어떤 답을 내놓아야 할지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나 역시 ‘알아듣지 못하는 사투리를 쓰는 사람’으로 살았다. 나는 그런 사람을 ‘이방인’이라고 표현했는데 어느 분은 댓글에서 그들을 ‘마이너리티’라고 불렀다. 그 댓글을 보면서 작가가 의도했던 것은 아마 ‘이방인’이 아니라 ‘마이너리티’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이방인’이 그저 낯선 사람이라는 ‘가치가 담기지 않은 말’이라는 것과 달리 ‘마이너리티’에는 그들의 ‘고단한 삶’이 녹아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와 작가가 겪은 상황의 차이였을 것이고.


작가보다는 나은 형편에서 이방인으로 살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삶이 고단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십 년 넘는 이방인의 삶을 접고 인천공항에 내렸을 때 이곳이 내가 살아야 하는 곳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만든 것은 바로 ‘우리 말’이었다. 남의 땅에서는 그저 소음으로 들리던 모든 소리가 하나하나 의미를 담은 말로 내 귀에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다. 잠시 다니러 왔을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깨달음이었다. 그것이 <이상한 사투리>에 끌려 <이미륵 평전>을 읽게 한 동인이었다.


“19세기 마지막 순간인 1899년 태어난 이의경은 경성의학전문학교를 다니던 도중 3.1운동 이력 때문에 1920년 독일로 망명 유학을 떠난다. 뷔르츠부르크 대학,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그는 1925년 뮌헨대학으로 옮겨 1928년 동물학 박사가 된다. 1931년 최초의 단편을 발표한 그는 1935년 <수암과 미륵>을 발표하면서 어렸을 때 불렸던 아명을 따라 미륵이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1940년에서 1943년까지 한국어와 중국어 문법책을 독일어로 출간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한국어 문법은 이론체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해, 중국어 문법책은 출판사가 연합국 폭격으로 원고를 분실해 결실을 거두지 못한다. 한자어 6만 개를 골라 독일어로 번역하려고 애를 썼으나 이도 뜻을 이루지 못한다. 1946년 그의 대표작인 <압록강은 흐른다> 발표해 독일 문단의 엄청난 찬사를 받는다. 가난한 유학생에서 시작해 사회인이 되었어도 그의 형편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다. 1948년 뮌헨대학에서 한국어와 한국사, 동아시아 문학사를 강의하면서 비로소 형편이 나아지지만 1950년 51세라는 이른 나이에 위암으로 사망한다.”


그의 일생을 따라가면서 1920년대에 한국인이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는 것에 놀랐고, 그랬던 그가 작가의 길에 들어서 독일 문단의 격찬을 받았다는 것에 다시 한번 놀랐다. 더욱 놀랐던 것은 <압록강은 흐른다>를 발표한 1946년 “올해 독일어로 쓰인 가장 훌륭한 책이 외국인의 작품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점이다. 낯선 나라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힘이 그런 평가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었을 테지만, “간단명료한 언어로 독일어 문체가 가지고 있는 예술성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는 예상을 뛰어넘는 놀라움이었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평론가들의 서평이 100편 넘게 신문에 실렸고, 한 잡지는 ‘올해의 가장 훌륭한 책’으로 꼽았고,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만큼이나 독일인들이 이 책을 아꼈고, 독일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문학성을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중 한국어로 출간된 작품은 <압록강은 흐른다>와 단편집 <이야기>, 그리고 <이미륵 평전>에 실린 단편 몇 편이 전부인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그의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게 된 것이 ‘문장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면 과연 한국어 번역본으로 그 맛을 살릴 수 있었을지 매우 궁금하다. 이미륵은 완벽한 독일어를 구사해 독일인 친구들을 주눅 들게 했다고도 하고 어떤 분야든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으며 그의 인품조차도 뛰어났다고도 한다. 평전 앞에 실린 사진으로 보면 그가 어렵게 살았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품위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그가 기독교에 대해 짧게 남긴 글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당시 지식인 시선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그는 기독교가 “진리라는 것을 단 하나의 가르침에 국한시킨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기독교를 ‘온전히 그곳에만 속하기를 강요하는 새로운 개념의 종교’라고 정의한다. 그는 또한 이 때문에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기까지 참으로 오랜 갈등을 겪어야 했다고 비판하는데, 이런 비판(배타성)은 지금까지도 기독교가 많은 이로부터 외면받는 가장 큰 원인이 되는 게 사실이다.


나는 평생 기독교인으로 살아오면서 성경이 진리라는 걸 의심해 본 일이 없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성경이 유일한 진리인가 하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성경에는 그것이 유일한 진리라고 해석할 만한 구석이 여럿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을 알아갈수록 성경이 진리이기는 하겠지만 오직 성경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예수께서 흡족하게 여기시는 답일까 하는 데는 의문이 생긴다.


삼대독자였던 그는 11세 때 해주상인 최 씨의 딸 17세 최문호와 결혼해 결혼 7년 만에 딸을 얻는다. 첫 딸은 3년 만에 잃고 둘째인 아들 명기를 얻는다.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난다. 책 말미에 누님 이의정의 증언을 통해 부인과 자식이 북한에 있어 소식을 알지 못한다고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족인데 평전에서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다뤄지지 않았다는 점은 아쉬우면서도 몹시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이미륵은 독일에서 살면서 이성으로서 호감을 느껴본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사망할 때까지 결혼하지 않았던 것을 과연 가족과 떼어서 생각할 수 있을까?


평전을 읽었으면 다음 순서가 그의 대표작인 <압록강은 흐른다> 차례가 되어야 할 것인데, 평전에서 다뤘던 발표 당시 독일의 반응이 오히려 그 작품을 읽는 데 방해가 되었다. 낯선 나라 이야기라서 많은 독자의 관심을 끌기는 했지만 정작 인기를 끈 원인은 ‘간단명료한 언어로 독일어 문체가 가지고 있는 예술성을 잘 표현한 그의 언어적 능력’이었다. 그렇다면 번역이 과연 그 맛을 살려내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 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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