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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잉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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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un 03. 2024

2024.06.03 (월)

취직하고 처음 출장 간 곳이 월성 원전이었다. 당시만 해도 경상북도 월성군. 현장에서 일하시던 선배들이 마침 그곳에서 아이를 낳아서 이름 말고 별명이 하나씩 붙었다. 양남면 나아리에 사시던 선배 딸은 강나아, 양북면 봉길리에 사시던 선배 아들은 최봉길이라고. 그 양북면이 지금은 ‘문무대왕면’으로 바뀌었다. 문무대왕 수중릉이라는 ‘대왕암’이 있는 곳이다.


그게 1980년 이맘때였으니 꼭 44년 전 일이다. 그 후로도 월성 원전 프로젝트가 열 건 가까이 이어져서 잊어버릴 만하면 한 번씩 다녀가야 했다. 사우디 현지법인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 출장지가 월성 원전 부지에 건설하던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현장이었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이곳에 발령을 받았다. 월성 원전은 아니고 이웃한 ‘문무대왕면’에 있는 현장으로 말이다.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일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다고 생각했다. 비상근으로 회사에 적을 둔 상태기는 했지만, 그래 봐야 자리 채우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체코 원전이 가시화되자 슬며시 욕심이 나기는 했다. 사우디에서 애만 쓰고 결국은 시작도 하지 못했던 해외 원전의 한을 풀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그러다가 기대하지 않았던 국내 현장에서 다시 한번 일할 기회를 얻었다.


‘월성군 양북면’이 ‘경주시 문무대왕면’으로 바뀐 것처럼 세상도 많이 바뀌었다. 서울에서 여기까지 하룻길이었는데 이젠 금요일 저녁에 올라가 월요일 아침에 내려올 정도가 되었다. 나이 칠십에 주말 부부라니 친구들은 아내에게 전생에 나라를 구했느냐고 묻는다. 요즘 가장 좋은 남편은 집에 없는 남편이라니 말이다. 사실 나도 그렇다. 쫓아다니며 시시콜콜히 지적하는 소리를 듣지 않으니 저녁 시간이 이렇게 길었나 싶다.


출근해 자리에 앉으니 좋기는 하다. ‘해야 할 일’이 스트레스가 아니라 설렘이 될 수도 있구나. 설계서를 훑어보고 현장을 돌아보는 것으로 일을 시작했다. 어색한 것은 현장 식구들과 인사할 때뿐, 곧 일상으로 녹아들었다. 그래, 수십 년을 해온 일인데.


그까이꺼 뭐. 다 뎀비라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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