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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잉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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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un 21. 2024

2024.06.21 (금)

가슴팍에 GAP이라는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셔츠를 자주 입고 다니는 친구가 하나 있었다. 평생 ‘을’로 살아서 한이 맺혔다고, 그래서 옷이라도 ‘갑’을 입어보겠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어디 영원한 ‘갑’이 있고 영원한 ‘을’이 있을까마는, 나 또한 평생 발주청의 눈치를 보고 살아오다 보니 그 모습이 그저 웃고 넘어갈 일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쉽게 친해지기 어려운 ‘갑’도 인연이 몇십 년 쌓이면 친구가 되기도 한다. 그런 친구가 어제 현장에 찾아왔다. 그 친구를 처음 만난 곳이 바로 지척에 있는 월성 원전이었다. 89년이었나 그랬는데, 그는 나를 처음 만난 게 81년이었다고 했다. 잠깐 현장에서 스치듯 만난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거지.     


그와 현장에서 만난 그날로 의기투합해 굳이 다른 방을 쓸 일이 뭐 있냐며 차라리 그 돈으로 술이나 마시자고 했다. 그렇게 몇 달을 함께 뒹굴었다. 그렇기는 했어도 둘 사이는 늘 건널 수 없는 강이 있었다. ‘갑’과 ‘을’이라는 역할이 다르고, 그 친구나 나나 분명한 자기 고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히 이십 년 넘게 함께 일하는 동안 서로 얼굴 붉힌 일은 없었다. 만나면 긴장해야 하는 사이였다는 말이다.     


본사에 복귀하고 현장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십수 년만의 일이었는데 이전에 둘 사이에 흐르던 긴장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세월이 좋은 것인가보다.     


굳이 현장까지 발걸음을 한 것도 고마운데 뭔가 바리바리 싸온 것을 내민다. 지질쟁이가 현장에서 써야 하는 무기들이었다. 지질 해머는 상표도 떼지 않은 새것이었고 해머를 걸 수 있는 허리띠까지 일습으로 갖췄다. 클리노미터는 포장도 뜯지 않았고. 현장 스케치할 때 쓰는 연필에 연필심, 연필심 가는 도구까지. 거기에 색연필과 야장도 열댓 권 가져왔다. 그렇지 않아도 현장에서 사용하는 기준을 제대로 기억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자기가 쓰던 교과서까지 가져왔다. 자기는 없어도 되고 나는 그거 없으면 기억도 못할 거라고 놀리는 건 줄은 알겠는데, 그래도 그게 어디냐.     


그가 이것저것 챙겼을 모습을 생각하니 고맙기도 하고 징그럽기도 하다. 내가 자기 애인인 것도 아닌데, 이 정도 곰살맞게 챙기는 건 애인이나 되어야 가능한 일 아니냐. 한잔 거하게 대접하려 했더니 글쎄 술값도 먼저 내버렸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 어디 두고 보자, 그 원수를 갚고 말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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