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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teOE Jan 04. 2020

진실을 가장하는 비밀이 싫은 이에게

책 <초현실주의 선언>

어느 밤의 일이다. 3종류의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하루 종일 사람 얼굴보다 식기세척기의 버튼을 마주하는 횟수가 더 흔했을 때다. 나는 그날도 여지없이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접시와 컵 따위가 아무렇게나 딸려 나와 흙탕물보다 더한 혼탁함을 자랑하고 있는 개수대를 보며 문득 답답함이 밀려왔다. 모든 것은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이다.

그놈의 책임은 유독 나에게만 철두철미하게 주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몸과 마음이 동시에 지쳐있었고 삶의 의미를 더 이상 찾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마음속을 휘젓는 수많은 불안들은 나를 판단하고 규정하고 멸시하고 비교하는 세상만 잡아당겨 데려오는 것 같았다.

정말 포기해야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포기해야지 다짐하며 퇴근하던 와중, 거리의 사람들은 많지도 적지도 않게 보통이고 보름달인지 초승달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달은 그저 평범했고 바람만 유독 추웠다.

울기 직전이었다. 얽히고설킨 복잡한 상황들이 나를 낭떠러지로 몰아넣고 내가 뛰어내리길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어떤 음악을 들어도 정신이 차려지지 않았다.






마법처럼 눈에 뜨인,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모 출판사 1층의 카페였다. 영업 마감을 30여분 남기고 직원들은 제법 분주한 모양새였다. 나는 의미 없이 카푸치노 한잔을 지르고 내 통장 잔고에 패악질을 하고 싶었다. 주문을 하고 눈길을 돌렸다. 수많은 책들이 아주 감각적인 형태로 전시되어 있다. 또 무슨 대단한 감성을 보여준답시고 이런 인테리어야? 반감이 들었지만 슬슬 구경을 시작했다. 내가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딱히 뭘 하지도 읽지도 않으면서 불안할 때마다 찾아갔던 곳이 서점과 도서관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하나, 아무튼, 그 불안증이 또 발동한 것이었다.

자, 어서 제일 어려워 보이는 서가에 가 책을 집어 들고 한 페이지 읽어보자. 그리고 필사적으로 이해해보는 거야. 그만큼만 이해할 수 있어도 나는 제법 쓸만한 사람 아닌가 생각하며 인스턴트 자존감을 채워보자. 집에 갈 때까지만 버틸 수 있다면 족한 뜬구름 잡기.

<초현실주의 선언>이라는 책이었다. 표지에 나온 사람들은 몇몇이 연기를 하고 몇몇이 생각을 비우고 남은 몇몇은 정말 몰입하고 있는 듯 보였다. 어 그래 제일 웃겨 보여서 합격이다. 책을 집어 들고 아무렇게나 펼치고 아무렇게나 읽어보았다.

나는 어떤 사람을 관찰할 때 그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에 많은 관심을 갖는다. 사람의 언어는 외모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화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비위가 상해 선을 긋게 되는 몇몇 부류가 있다. 여러 가지 기준으로 분류해볼 수 있지만 공통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란 바로 이런 것,

| 어울리지 않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나의 주관적 느낌으로 관찰해보건대 어떤 식으로든 그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거나 부자연스러운 말을 사용하는 사람 말이다. 의도가 선하건 악하건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무언가 지금 내뱉고 있는 말이 그 사람을 전부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중요하다. 그런 느낌을 주는 사람은 대개 양면성이 뚜렷하고 지극히 비밀스러운 사람이다.

나는 진실을 가장하는 비밀이 싫다.





그런 의미에서 <초현실주의 선언>은 굉장히 흥미로웠다. 나는 이 책에 담긴 깊은 의미와 철학 사조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딱히 다 이해해주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저자인 앙드레 브르통이라는 자가 얼마나 생각이 많고 예민하며 성질머리가 있으면서도 잔정이 많은 양반인지에 대해서는 일부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마음을 위로하며 울린 페이지가 몇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은 지극히 나의 입장에서 와 닿았던 낱말이며 이 양반의 의도나 초현실주의 철학과 결을 같이할 수 있는 부분인지는 모르겠다. 어떤 구절이었는지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요컨대 우연히 발견한 철학서 하나가 우울해 죽기 직전인 쓰리잡 알바생을 낭떠러지 앞에서 구제해 주었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된다. 나를 이해해주는 또 다른 존재가 이 세상에 있다는 분명한 믿음. 그것을 누군가의 떨리는 두 손에 쥐어주었다는 점이 이 책의 철학적 가치를 말해줄 수 있지 않을까.

| 철학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활용하고 공감할 때 더 재미있다.

서점에 나가보면 오랜 역사에 걸쳐 만들어진 고전 철학서들이 제법 구석진 서가에 비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재해석하거나 공감해서 발전시킨 새로운 형태의 철학서들이 다양한 이름을 뒤집어쓰고 메인 서가에 비치되어 있다. 심리/교양/자기 계발 등의 카테고리에 한데 묶여.

비판의 의미가 아닌 순수한 감상으로 말하면, 잘 팔리는 책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나는 자기 계발 서적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른 이의 삶이 너무 많이 녹아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운과 우연과 노력과 경험으로 빚어낸 아주 가벼운 형태의 엑기스로 이루어진 철칙에 당신의 삶의 방향을 결정할 것인가. 간편하고 맛있지만 레토르트 식품이라면, 다시 한번 당신의 식단에 대해 심도 있게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제법 있다. 나이가 들수록 지나간 인생을 후회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형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철학은 어렵다. 철학서가 어렵다. 접근하기 더럽게 어렵고 짜증 나는 데다 어떤 문장을 이해라도 할라치면 수많은 지성인들이 내가 이해하는 모습을 일일이 비웃지는 않을까 아니면 겉으로 웃으면서도 속으로 으휴 저 가련한 중생 같으니 쯧쯧 혀를 차지는 않을까 따위의 자기 검열을 무시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이런 부분이 정말이지 마음에 안 든다. 아니 애초에 한국에 번역을 들여왔으면 한국 문법을 좀 존중하고 그래야지 아니 뭘 이렇게 한 문장에 의미도 많고 더럽게 길고 마침표는 보일 생각이 없고 싶어 봐야 난 초심자고 비전공자니 그러한 불평이야말로 효력 따위 없지 않겠나.

그래서,

철학은 그저 내겐 취향의 영역이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내가 욕심부리고 싶은 만큼만 배워 활용할 요량이다. 내가 걸어온 삶의 경험은 책 보다 더 위대하고 가치 있는 나의 것이기에. 물론 이것이 누군가의 소중한 탐구를 깎아내리거나 판단할 의도로 하는 말은 전혀 아니다. 나는 이렇다는 것이다. 날을 세우지 않았으니 칼싸움할 의도는 없다는 의미 정도.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더도 덜도 말고 나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삶을 살며, 그 어떠한 가식에도 휘둘리지 않고, 실패와 실수와 자책과 고통에 굴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 어디서도 부끄럽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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