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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teOE May 10. 2019

그 어떤 신화보다 영웅적이며 자기 투사적인

영화 <로마>

 내게 F는 유독 달갑지 않은 알파벳이다.


F는 스무 살, 그러니까 막 성인의 대접을 받으며 갑자기 주어진 권리에 방종을 부리고 싶었던 내게 주어진 낙인이었다. 에프. 에프라니. FFFFF.. 그 이유인즉슨 청소년 시절 내내 꿈꾸었던 지성의 산실과 살아있는 토론문화의 장이 펼쳐질 것이라 예상했던 나의 유토피아 때문이었다. 들어가기만 하면 살이 빠지고 남자 친구가 생기며 하고 싶었던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그곳, 바로 대학교. 나는 추가의 추가합격으로 아주 운이 좋게 대학에 갈 수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겁도 없이 지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당시의 입시 트렌드는 수시였다. 내신만 착실하게 쌓아놓으면 논술과 구술 스킬을 늘려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수시 지원 제도가 막 떠오를 때. 입시의 산실 목동이라는 지역에서 제법 유명했던 모 고교가 이를 놓칠 리 없었다. 학교에 갑자기 논술 보충수업이 신설됐다. 글쓰기라, 재밌겠다, 선생님은 누굴까, 안내문을 읽던 시선이 멈췄다. 담당자는 학교에서 괴짜로 소문난 윤리 선생님이었다. 


 첫 수업부터 별다른 본인 소개 없이 학생들에게 질문부터 던졌던 당황스러운 첫인상. 대학교 교양 강의에서나 들을법한, 윤리란 무엇인가 라는 철학적 질문에 당황한 7차 교육과정의 새싹들. 윤리란 생활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느릿한 발음으로, 윤리라는 것은 5지선다 문항에 가둘 법한 단편적인 분야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괴짜 선생님. 그 강렬했던 첫인상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중학교를 지나 힘겹게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운 좋게 배정된 좋은 학교. 여유가 없던 환경에 공짜로 들을 수 있는 보충수업의 기회. 그리고 내 눈을 유일하게 뜨이게 하는 선생님의 수업. 이 모든 것이 훗날의 나에게 던지는 필연적 메시지가 있을 것이라는, 다소 터무니없는 운명적 믿음이 일었다.






 놀랍게도 일리가 있었다. 그때의 경험이 현재까지 내게 미치는 영향이 제법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지향하며 살리라 다짐한 여러 가치들은 모두 그때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목록들은 다음과 같다. 세상의 모든 비겁함을 혐오하고 틀에 박힌 것을 깨부수되, 어둠과 빛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자세를 가질 것.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을 경계하는 마음을 유지할 것. 그리고.


 세상의 모든 상처 받은 사람들을 함부로 약자라 규정하지 않을 것
 사람의 삶을 함부로 판단하고 등급을 나누지 않을 것


 마지막 두 문장은 최근의 나에게 절절히 와 닿는 구호였다. 대학에 크나큰 로망을 덧입혔던 내가 알코올과 기싸움이 가득한 던전에 실망하고 등교를 거부했던 것도, 그로 인해 쏟아진 성적표 위의 F라는 글자와 학사경고 통지도. 어린 날의 내가 버리지 못했던 편협한 실수였을지 모른다.


 나는 학교를 나가지 않은 대신에 아르바이트와 자원봉사에 몰두했다. 돈은 벌어야 했지만 지루하게 살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어느 시민단체에 들어갔다. 남들이 학점을 채우고 인맥을 넓히고 있을 시간에 나는 편의점에서 돈을 빨리 계산하고 작은 사무실에서 서류를 정리하는 일 따위에 재미를 붙였던 것이다. ㅇㅇ씨, 라는 어색한 호칭을 듣는 것도 묘한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 그만둬. 우리 이제 내일까지 보겠네”

 항상 나와 함께 일하던 시민단체의 간사님이었다. 그 당시 간사님은 지금의 내 나이였다. 너무나 어른처럼 느껴지던 스물아홉. 매일 일하지 않으면 사람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다고 믿었던 나는 조심스레 다음에 그녀가 향할 곳을 물어보았다.



“그런 거 없지. 일단 돈 모은 거 다 떨어질 때까지 놀아야지.”



 그리고 호탕하게 웃어젖히는 얼굴은 성적표 위의 학사경고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돈이 다 떨어지면 대체 어떻게 살려고 저런 말을 하지. 제정신이 아닌가. 집에 돈이 많은가. 분명 아니라고 했는데. 저 초연함은 뭐고 배짱은 또 뭔가. 나는 그 비범함의 이질감을 감당할 수 없어 그다음 날까지 속으로 그녀를 맹렬히 욕했다. 사람은 항상 큰 목표와 기개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저렇게 영양가 없는 하루살이 인생을 살겠다니, 한심하군.


 20대 중반엔 반드시 이런 삶, 후반엔 저런 삶, 30대가 되면 빛나는 그런 삶 등등의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한 긍정과 과장된 목표가 없이는 한순간도 견딜 수 없었던 현실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랬던 당시의 그녀와 나를 투사하게 되는 여자가 있다.

흑백의 화면 속은 멕시코 시티의 로마 스트릿 같기도, 9년 전의 종로 골목 같기도 하다. 소리 없이 삶과 사랑을 겪어내는 가정부는 클레오 같기도, 간사인 그녀 같기도, 그녀를 비난했던 나 같기도 하다. 


 영화 <로마>의 이야기다. 단조롭지만 웅장하다. 나란히 쓰일 수식어가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 한 사람의 삶이 집중적으로, 흑백의 화면을 통해 전달된다. 그러나 이것이 무엇을 조명하고 있는 건지 헷갈린다. 분명 중심인물을 비추고 있으나 색감이 없다. 영화 속의 모든 요소들이 전부 힘을 빼고 있다. 흑백의 화면 속엔 색도 음악도 인물도 심지어 메시지조차 가득 차지 않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무엇인가 가득하다. 화면을 둘러싸고 있는 어린 날의 나와 그녀가 내 마음을 가득 채워 당황스럽다.


혹자의 시선에서는, 클레오는 약자이며 불쌍한 삶을 산 여자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상처를 딛고 일어선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로마>는 그 어떤 영웅적 스토리보다 영웅적이며 자기 투사적인 마력을 갖고 있다.


 영화는 그 언젠가 나의 존경하는 선생님이 나에게 가르쳐 주셨던 것처럼,

 상처 받은 사람을 함부로 약자라 규정하지 않고, 사람의 삶에 등급을 나누는 시선을 철저히 경계했다.


 멋진 감독이다.


 최근 백수가 된 내 잔고를 조금 더 자신 있게 바닥낼 용기가 생긴다.


 무언가 잘못짚은 것 같지만 이역시 당신의 기분 탓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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