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주위의 모든 화살표가 반대를 향해 있더라도 운명처럼 선택하고 마는 것들이 있다.
이 쯤 되면 고통을 즐기는 류의 변태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는 항상 안정보다 불안을 택하는 삶을 살아왔다. 전혀 단순하게 질러버려도 되는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백 번을 생각해도, 당시엔 그 길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변명이다.
그것은 이따금 본능이 이성을 무력화시키는 순간이다. 서울로 이사를 가겠다며 아빠 속을 뒤집어놓던 16살의 패기나, 대학을 가지 않겠다며 엄마 속을 뒤집어놓던 19살의 무모함이나, 전공을 버리고 새로운 일을 하겠다며 집안을 뒤집어놓던 24살의 늦바람 같은, 그리고.
그 어느 봄날도 그랬다.
그날 이후 나는 아주 투명하게, 누구나 다 눈치챌 수 있을 만큼 순도 100% 바보의 삶을 자처했었다. 여기서 그 어떤 과도한 수사와 비난의 말을 덧붙여도 변명의 여지가 없을 만큼,
첫사랑이었다.
엄두가 안 날 정도의 강한 몰입이었다. 너무 좋아서 전화기에 뜨는 이름 석 자만 봐도 숨이 안 쉬어질 지경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휘둘리나 싶을 정도의 강력한 열병이었다. 그가 내 능력과 꿈에 대해 어떤 날 선 비판을 해도, 제게 마음이 있다면 당장 그만두라는 매몰찬 공격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가장 낮은 곳에 앉아 그를 올려다보는 일을 자처하고 있었다. 마치 돌아오지 않을 어미새를 기다리는 아기새처럼. 그저 비난이어도 좋으니, 나에게 우연히 떨어지는 일말의 관심이라도 얻기 위해 매일을 기웃대는 가엾은 모습을 하고는, 사랑을 구걸하고 있었다.
생활의 모든 부분에 지장이 생겼다. 스스로를 사랑 앞에 하찮은 존재로 만들고 나니 일상이 회색빛으로 변해갔다. 마치 저주 같았다. 내 마음이 이루어질 수 없다니. 그렇다면 마음을 죽여야지. 다시는 이런 식으로 사람을 좋아하고 몰입하지 말아야지. 독한 의지로 결심을 세운다.
그러나 그를 마주 보는 순간에 원위치. 사고 회로는 모두 정지되고 만다. 그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입을 열면 경청하고, 입을 닫으면 이유도 묻지 못한 채 기다리는 나날들이 나의 아무 저항도 없이 반복되었다.
나는 어째서 의미 없는 짓을 하는 것인가. 그 사람이 나보다 그렇게 중요한가. 대체 저 사람 따위가 뭔데. 나에 대해 아무것도 베풀어주지 않을 사람에게 왜. 대체 왜.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살기도 힘든데. 또래들보다 더 모질게 느껴지는 이 지긋지긋한 삶을 버티기만 해도 이렇게나 힘이 드는데. 그 사이에 난데없이 끼어든 불청객의 존재에 나는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그때 이후로 나를 지키는 법을 깨달았다.
마음이 깊어지면 그 마음을 죽이면 된다. 상대를 우습게 여기면 된다. 사랑의 설렘을 동력 삼아 새로운 삶의 의지와 목표를 세우면 된다. 훗날 다시 마주쳤을 때 그 누구도 나를 함부로 여기고 무시할 수 없도록. 내 마음을 짓밟을 수 없도록.
도움이 됐냐고? 아니. 헛된 다짐이었다.
나는 그 이후에도 몇 번이고 다른 사람과 기꺼이 사랑에 빠졌다. 사랑하며 행복해하다가, 때로는 울고, 웃고, 싸우고, 그러다 헤어지고, 힘들어하고, 다시 결심하길 반복했다. 이렇게나 비 생산적인 쳇바퀴라니. 사랑은 더 이상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되어버렸다. 눈치챈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벗어날 수가 없었으니.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이것은 내 사랑의 형태였다.
나를 지키는 방법을 수 십 가지 되뇌어 보아도, 홀린 듯이 다가가 두꺼운 가시 위에 피부를 긁고 마는 천치의 짓. 그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또 다른 가시를 향해 달려드는 바보 같은 건망증. 피를 흘리면서도 스스로 불을 붙여 시작하는 멍청한 희생.
그러나 위의 과정들이 내게 가져다준 것은 행복이었다. 찰나의 순간이라도, 온전히 그리고 유일하게 교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경험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이었다. 수십 년을 다른 환경에서 살아와 우연히 맺게 된 인연이 내게 유일한 의미의 존재가 된다는 것, 정말 가슴 뛰는 일이다.
둘만의 세계, 둘만의 언어, 둘만의 감정. 새로운 사랑이 자아내는 경험은 모두 새로운 것 투성이다. 나아가 사랑하는 사람의 앞에서만 드러나는 표정, 모습, 말투, 생각 등등.. 이 모든 것이 다른 사람과는 교감할 수 없는 그야말로 유일한 영역이 아닌가. 희소하고 신비로운 사랑의 과정을 경험하며 우리는 저도 모르게 순수한 행복의 영역에 가 닿는다. 마치 우주처럼. 이다지도 찬란한 경험이라니.
그렇기에 나는 매번 무모하게 바보 천치가 된다. 두려워도, 무서워도, 언젠가 유일하고 진정한 반쪽의 형태를 마주할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