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잠들지 못하던 어느 밤의 일이다. 그날은 커피를 연거푸 3잔을 마신 날이었다. 평소에도 2잔 이상은 마셨던 것 같지만 유난히, 최근 들어 어쩐지 몸이 버텨내질 못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불안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고통스러웠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바로 몸에 증상이 나타나는 탓에 잠을 잘 자지 않으면 몸도 마음도 두 배는 더 힘들었다. 예민해지는 것은 기본이며 이번엔 어떤 기상천외한 잔병이 나를 덮쳐올까 싶은, 다소 과도한 염려증 역시 동반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것 또한 삶의 일부일까, 으레 일어나는 오래된 의식의 흐름이 되고 말았다.
그날도 비슷했다. 나는 잠이 오지 않는다는 불안과 내게 고통을 안겨주는 잡다한 생각들 사이에 파묻혀 인상을 쓰고 누워있었다. 심장은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었고,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 불행한 뫼비우스 띠의 원인과 결과는 모두 공허함에 있었다. 심해의 심해까지 뚫린 것 같은 공허함을 채우려 고민하는 나날들. 그러나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또다시 공허한 것. 인력으로 어쩌지 못하는 야속한 운명을 인정하고 마는 것이 어쩐지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그 누가 보기엔 유치하고 무의미하며 치기 어린 사춘기의 고민 같은 것이기도. 그렇다면 왜일까. 무엇 때문일까. 나는 어째서 이다지도 텅 빈 구멍을 갖고야 만 것일까.
인간 존재의 이유를 찾던 수많은 철학자들의 물음을 따라가 보면 내 정신적 체력의 한계가 가리키는 방향은 모두 공허함에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나의 지적 한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허함이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야말로 불가해한 것이 아닌가?
순수라는 단어에 과도한 미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공허함과 싸우는 사람은 대체로 순수한 것 같다.
그 정도를 모르고 마냥 방종을 부리는 사람은 당연히 제외다.
공허함을 이겨내려 애쓰는 사람은 적당히 때 묻은 어떤 상태를 외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100퍼센트 진정으로 수용할 수 있는 순수한 형태를 추구하는 것. 그것이 아닌 무언가는 받아들이지 못해 게워내고, 또 게워내는 순간의 반복을 마주하는 것. 언제 와 닿을지 모르는 찰나의 영원을 위해, 기나긴 세월과 순간의 상처들을 버티어 내는 것.
마츠코는 바보 같고 무지하며 순수한 여인이다. 방향을 잃고 공중을 떠도는 위태한 솜사탕이며, 너무 달아서 두통이 이는 진득한 시럽 따위의 존재. 순수함에 갇혀 공허를 쫓는 순수한 존재. 그래서 자체만으로 너무나 반짝거리지만, 복잡하기 짝이 없는 세상 속에선 아무도 그 빛을 보지 못한다.
혐오스러운 그녀의 삶을 표현하기 위해 아름답고 화려하며 다채롭게 구성된 미장센은 역설적으로 마츠코 그 자체를 그려내고 있다.
나는 그녀의 마음속에 크게 자리 잡은 공허에서 나를 본다. 깜깜한 무기력이 거울처럼 나를 비춘다. 어떤 물을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은 타는듯한 목을 할퀴어댄다.
채울 수 없다면 파괴해야 할까. 나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하는 새인가. 그녀를 통해 발견한 나는 무엇일까, 무엇이었을까,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그 답을 향한 혐오와 번민 사이에 또다시 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