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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teOE May 02. 2019

위기와 비난과 자극만이 나를 움직인다

영화 <블랙스완>

 꽤 먼 거리의 학교를 통학하며 숨 막히는 아침을 견디는 것이 버거웠을 어느 무렵의 일이다. 나는 고집대로 살기 위해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았던 삶을 비관하기 싫어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오늘 나를 스쳐간 모든 사람보다 더 빛나는 사람이 될 거야.


 빛난다는 말은 정확한 비교군이나 객관적 가치판단이 모호한 말이었음에도, 반드시 그러고야 말겠노라 허공에 이를 악 물곤 했다. 뭐하러 그랬는지 지금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스스로에게 조금이라도 관대했다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의 8할은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유롭다고 느낄 때 가장 행복하다. 

그리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러나 나는 곧 죽어도 자유를 갈망할 것이다. 이 세 문장 사이에 감당해야 할 현실적인 한계들이 매 순간 나를 옥죈다. 그러나 더 높은 곳에 올라 더 넓은 세상을 누리고 싶다는 욕망은 미성년이 채 되기도 전에 내 인생에 쏟아진 어이없는 재난들을 감당할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이기도 했다. 무엇이 더 나은 것인지 알 수 없다. 끔찍한 비극이다. 매 순간 딜레마에 빠져 장단점을 계산하느라 모든 기력을 다 소진하고 나면 또 다른 딜레마가 얇은 빙판처럼 펼쳐지고 만다. 나는 그 위에서, 위험과 순응 사이에서, 최대한 행복하기 위해 날을 세우고 살얼음판을 걷는다. 그러고 나면 행복하고 싶어서 노력하는 모든 것들이 종국에 나를 불행하게 한다.


 객관적으로 기뻐 보이거나 축하받을만한 일이 생겨도 전혀 즐길 수 없다. 이렇게 보면 나는 계단에서 넘어지지 않고 빨리 올라가는 것이 중요한 사람이지, 더 높아진 경치를 보려고 계단을 오르는 것이 아닌 것만 같다. 비극적이다. 나를 지켜보는 다른 이들은 나를 대견해하고 신기해하고 응원의 손길을 보내지만 그 빛은 너무도 나약해서 내 그림자를 몰아낼 수가 없다. 나는 더 까맣고 긴 그림자를 만들어 존재감을 확인한다. 기형적이다. 확실한 그림자의 존재만이 내게 안식을 선사할 수 있는 것일까.


 이따금 내가 추구하는 궁극의 자유가 아이러니하게도 전혀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느껴지기도 한다. 아무 비난도 받지 않고, 아무 위험도 없이, 누군가 지정한 단순하고 소모적인 일을 실행했을 때 다가오는 마음의 평화. 이건 대체 무슨 알고리즘인가. 나는 고작 이런 것을 추구하기 위해 이 엄청난 먼 길을 돌아 올라가고 있는 것일까.


 동경하고 고대할 때는 마치 별 같기 마련이다. 하지만 다가갈수록 멀고 높게 느껴진다. 그럴 때면 내 인생이 마치 어디서부터 끊어내야 할지 모르는 얽히고설킨 사슬 더미 같다. 대체 어떻게 풀어내야 하지. 그러나 더딜지언정 애써 올라온 계단을 뒤돌아 내려가거나,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꼬락서니는 죽어도 보여주기 싫다. 이런 고집만이 나를 위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뭘까. 계단을 오르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곪고 썩어가는 상처는 돌볼 여유가 없는 로봇인 것 같다.


 위기와 비난과 자극만이 나를 움직인다. 움직이는 것 같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자유롭고 싶다. 자유만이 내게 행복을 줄 수 있다. 행복하고 싶다. 정말 행복하고 싶다.


 자유를 얻기 위해 스스로 사슬을 감고 한 치앞도 보이지 않는 위험한 돌계단을 오르는 사람. 나는 누구일까. 있어야 할 곳이 아닌 장소에 떨어진 미운 오리 새끼일까. 아니면 그저 날고 싶은 백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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