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위대한 개츠비>
나는 배터리 충전에 대한 강박이 있다.
어떤 기계이건 1/2 이하로 떨어지기만 하면 재빨리 충전에 대한 대비를 세워놓곤 한다. 실금 같은 불안조차 용납하지 않는 완벽한 안정에 관한 강박적 추구. 내 성격을 가장 단편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예다.
나만의 안정적인 세계에 금이 가면 나는 모든 분야에 통제력을 상실한 망나니가 된다. 그렇다, 망나니. 다소 격한 표현이지만 그때의 나는 이 단어로 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어떻게 행동해야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으면서, 오히려 정 반대의 행동을 거듭하며 나의 불안을 여기저기 분산시키려 하는 제3의 자아가 출현하고 마는 것이다. 마치 뇌를 인질 잡힌 것 같다. 내 행동에 사람들이 어떤 감정과 반면교사를 얻어갈지 실시간으로 느끼고 있으면서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단단한 호떡 반죽 안에 갇혀 견과류 따위와 함께 녹아 흐르는 황설탕이 되고 만다. 내게 뻗어오는 다른 이의 손위를 지저분하고 진득하게 더럽히는 가련한 sos.
양가적이다.
나이면서 내가 아니다. 어찌 보면 과도한 긍정주의가 낳은 괴물 같기도 하다. 나는 절망을 마주함과 동시에 희망을 향해 손을 뻗도록 프로그래밍되어있다. 이것은 태생적으로 갖고 태어난 긍정적인 성향 덕분인데, 안타깝게도 내가 자라면서 그 무기를 언제 꺼내야 하는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등의 방법론을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어린 내가 유일하게 지표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오고 가는 사람들의 표정과 말투였다. 그러니 삶의 가치와 기준이 타인에게로 향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렇기에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면 타인이 중요하게 다가오는 시점이 아닐까. 그 기저엔 야망이나 우정 혹은 사랑 등등의 근거가 쓰일 테다. 구태여 비유하자면 초록색 불빛 하나가 희망처럼 지평선 위를 비추어 올 때 함께 기지개를 켜곤 하는 위대한 개츠비의 설렘 따위들.
이때에 타인 지향적 삶을 사는 몰입형 완벽주의자는 새롭게 나타난 인생의 구원자에게 초점을 맞추려 든다. 왜곡해 기억과 미화된 커뮤니케이션을 조각조각 수집해 마법의 성을 만들어 내고, 온갖 경우의 수를 따져가며 형체를 알 수 없는 마음을 갈구하는 것에 절대적 이상을 덧씌우는 작업을 시작한다.
불행하게도 이토록 맹목적인 끈기가 빚어내는 저주는 상상 그 이상이다. 이것은 축복의 탈을 뒤집어쓴 가시밭길이다. 매 순간 살고 싶게 하면서도 일순간 죽고 싶게 하는 굴레. 허약하게 전소된 채 남아 아스라이 형체만을 유지 중인 잿더미들.
그러니 어쩌면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지구 하나를 들어 올려야 할 만한 지렛대의 힘이 아닌가. 그 대단한 제이 개츠비조차 생의 절반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이상은 불가능한 영역일지도.
그렇다. 미로같이 중언부언 복잡한 미사여구로 나열된 문장들을 토해냈으나 사실 결론이라면 이렇다.
나는 개츠비가 가엾다.
그들은 흔한 세상의 모습처럼 가혹하다.
단지 데이지의 미소를 원했을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