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러브 앤 드럭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조각들이다.
각양각색의 모서리를 빛내며 이곳저곳에서 제 존재를 뽐내는 파편들은 언제나 불안하고 뾰족하며 흔들거린다. 어쩌면 우리는 원형이 존재하지 않는 조각 그 자체로 태어났을지 모른다.
어릴 적 이유도 모르고 가장 좋아하는 로맨스 영화가 되었으나, 지금은 왜인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은 <러브 앤 드럭스>를 오랜만에 다시 보았다. 서로가 잘 만들어진 조각일 때보다 날카로운 파편임을 인식할 때 본능적인 동질감을 느끼는 인물들, 비단 우리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 제법 반갑다. 잘 맞지 않는 각자의 날카로움에 베이고 다치며 아파하다, 그 반짝거림에 이끌려 다시 끌어안기도 하고, 영영 끌어안지 않기도 하고, 그저 하하 웃으며 공중에 함께 붕- 떠있기도 하고, 그대로 부서져 더 작은 파편으로 변하기도 하는 존재들.
영화 속 주인공 매기(앤 해서웨이)는 이른 나이에 파킨슨 판정을 받고 '될 대로 돼라'는 식의 하루를 살고 있었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독립적인 존재 앞에 내린 가혹한 불치의 병은 가득 상처받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그녀를 더욱 가짜 세상으로 내몬다. 끊임없이 가벼운 관계를 이어나가며, 하루나 이틀, 아니면 한 달 정도의 '볼 장'을 다 보고 나면 그저 어떻게 되던 아무 상관이 없는 냉소적 일상을 살아가는 그녀.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매기는 주말이 되면 약 값이 없어 저렴하게 약을 구해야 하는 노인들을 위해 기꺼이 봉사에 나서는 사람이다. 투어 버스에 한가득 사람들을 태우고 다른 도시로 데려가 무사히 약을 구해올 수 있도록 돕는 심성의 소유자. 집에서는 홀로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어 자신의 마음을 가만히 짚어보기도 한다. 사실은 여리고 따뜻하며 정 많은 성격을 지닌 매기.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이런 '인간적인' 모습을 연애 상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
그런 그녀에게 다가온 제이미(제이크 질렌할)는 타고난 말재간과 센스, 외모를 등에 업고, 직장에서 물의를 일으켜 쫓겨날 정도의 아주 대단한 바람둥이다. 역시나 깊은 연애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아 하는 그는 집에서도 반쯤 내놓은 사고뭉치 부잣집 막내 도련님인데, 판사인 누나와 잘 나가는 사업가인 형 못지않은 똑똑함을 지녔지만 어린 시절부터 앓아온 ADHD의 후유증으로 자존감에 깊은 상처를 지니고 있다. 그 역시 이런 '인간적인' 모습을 연애 상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 그렇게 우연한 화학적 이끌림으로 만나게 된 제이미와 매기는 첫 만남부터 가볍고 쿨한 몸의 파트너십(?)을 나누곤 절대 진지한 관계를 맺지 않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가 불완전한 파편임을 인식할 때 깊은 동질감에 빠져드는 존재들이다. 제이미와 매기는 점점 '인간적인' 상대의 면모에 빠져들며 한 발씩 더 깊은 영역에 발을 내딛게 된다. 그 과정 속에서 혼란을 느끼는 두 사람의 감정, 특히 매기의 심경을 지켜보던 어린 날의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동질감에 더욱 과하게 몰입했던 것 같다. 영화를 처음 볼 당시엔 그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할 수 없었으나 지금은 왠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불완전한 두 조각들.
'조각'은 깨어진 파편을 칭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잘 다듬어 낸 미술품 등을 가리키는 데에 쓰인다. 그래서인지 매번 나라는 조각은 그저 파편 일지, 아니면 잘 다듬어진 제법 봐줄 만한 인간일지에 대해 이따금 멍하니 고민에 빠지곤 했다. 이것은 망상에 가깝다. 그러면서 버려지는 것은 찰나의 빛나던 순간들, 시간들, 체력, 건강... 등이 있겠지. 나는 잘 다듬어진 '조각'이야말로 진짜 내 모습으로 비치기를 원했다. 내가 파편 따위 일리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일종의 고집이다. 그러나 '조각'을 만들어 내놓는 데에는 부단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진짜 나라는 존재에겐 가히 행복을 좀먹는, 대단히 어리석은 행위가 아닌가 한다.
어떻게 된 모양인지, 인생에 있어 예상 가능한 패턴과 계획에 끊임없이 집착하는 나에게 벌어지는 거의 재앙과도 가까운 순간들은 모두 '인간적인' 모습을 띄고 있다. 나는 그것들에 대해 깊게 생각한다. 완벽한 것은 인간적인 것과 언제나 대치된다. 군더더기 없는 모습은 언제나 저만치의 거리를 두고 사람들에게 경외 혹은 경멸의 감정에 취하게 한다. 어떤 것이 더 멋진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흔들림 없던 내 가치관에 요즘 지속적인 균열이 일고 있다.
나이가 들며 세상에 대해 바뀐 시선이 있다면 바로 이런 지점이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감성적이고 충동적이다. 그리고 가면을 쓰는 듯하면서도 솔직하다. 누구나 나약해지는 순간이 있고 벌거벗은 채 포옹을 받고 싶은 순간이 있는 것이다. 그 본능적인 욕구가 제멋대로 튀어나와 만드는 순간들을 우린 '인간적이다'라고 표현한다. 지난날의 나는 '인간적'이라는 것이 그저 어설프거나 능력이 없는 것을 대충 사람 좋아 보이는 말로 퉁치는 표현이 아닌가 비웃었지만, 그새 고작 몇 년이 지났다고 내 사고방식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인간적이라는 표현은 글쎄, 조금 더 원초적이고 우발적이며 본능적인 순간이다.
아주 오랫동안 굳어진 조각 위로 부서지는 빛나는 시간들. 그것이 내게 더 이상 재앙은 아닌 것 같아 새삼 달리 붙여보고 싶은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아무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