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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teOE May 02. 2019

새로운 자극과 지루함의 소멸 사이 그 어디쯤

영화 <뉴니스>

 그날은 금요일 밤이었고 나는 너무도 지쳐있었다.


일주일 새에 놀랍도록 조용해진 핸드폰을 노려보며 근본 없는 초조함을 느끼던 중이었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소음에 두통이 일기 시작했다. 맞붙은 뒷좌석에는 혼잣말인지 통화인지 모를 크기로 축구 중계를 시도하는 이상한 남자가 앉아있었고, 그 왼쪽에는 전세살이의 불만을 토로하는 아주머니들의 부동산 대화가 큰 소리로 이어졌다. 인상을 찌푸리며 그들을 훑어보던 중, 그 사이에 낀 또 다른 희생양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빛에서 이유모를 격려와 짜증이 스쳤다. 그래 그쪽도 고생하겠구나. 짧은 한숨을 내쉬고, 이어폰을 집어 들었다. 건설적인 나의 미래를 위해 미리 준비해두어야 할, 다소 거창한 이름의 작업 리스트를 열었다. 그런데.


 갑자기 모든 것을 뒤엎고 싶었다. 구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노트북을 던져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적 의지가 얼마나 강렬했냐면, 실제로 손이 부들부들 떨려 커피잔을 똑바로 잡지 못했을 정도였다. 여태까지 살아온 인생에 대해 이유모를 환멸이 드는 순간. 갑자기 왜. 이것이 단지 주기적으로 오는 일상의 권태인지, 아니면 지금 내가 뭔가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인지 그 이유를 몰랐다. 이 불안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나는 무엇으로부터 지쳐있었을까.






 희망찬 인간관계에 대한 열망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점이 있었다. 스스로를 지키지 못할 만큼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지인들의 애정 어린 비판 역시 산처럼 쌓여가던 때였다. 나는 온 지구 상의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올 기세로 마치 현자의 코스프레를 하듯 초 긍정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자 했다. 어떤 고난이 와도 그를 이겨낼 만한 해맑음을 가지려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저런 시행착오에 크게 데고 나니 정신이 들었다.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베풀던 위험한 자비로움. 예상보다 내상이 심했다. 나는 두 날개를 스스로 떼어버리고 무한한 자아비판의 세계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는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무엇으로 두드려도 깨지지 않는 단단한 고치를 만들고는, 그 속에서 영원히 잠자는 누에가 되고 싶었다.





 어느 날은, 면전에서 대뜸 이런 말을 들었다.


"요즘 나비의 날개는 탈부착이 가능하다고.
날개만 붙이면 누에도 나비인 척할 수 있어. 그뿐이야?
요즘 고치들은 양방향 온오프인걸."


 술자리였고, 삶의 가치관에 대한 의미 없는 토론의 와중이었다. 거나하게 취기가 오른 누군가가 내게 토를 달았다.

"쉽게 말해 이런 거지.
네가 세상에 마음을 주지 않아도 대충 그런 척하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괜히 골치 아프게 그런 걱정하지 마."


 다소 근본 없는 소리였다.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잠자코 들어주었다.


"생각해봐. 인간관계의 인은 마치 인스턴트의 인이라고.
만약 한자만 써야 하는 세상이 온다면 인스턴트와 인간관계의 인은
모두 공통 표기를 쓸 거야. 제법 그럴듯하지 않아?"


 그 실없는 소리가 점점 재밌었다.





 그 말에 따르기라도 하듯 가짜 날개를 만들었다. 잘 만들어진 인조 날개를 열심히 탈부착하는 방식으로, 진심 없는 진심을 가장하며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관계의 형태가 어떻든 가리지 않았다. 질보다 양이지. 온 세상 어린이건 남자건 여자건 개새끼 건 양아치 건 할 것 없이, 모든 형태의 인맥을 내 세상에 추가해보고 싶었다. 그게 바로 다채롭고 가치 있는 삶이다, 그렇게 믿었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흥미롭고 희소하며 매력적인 삶을 향해 날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다시 지쳐갔다.


 그때 즈음 어떤 사람을 만났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이었고, 그는 진짜 나비였다. 너무나 아름다워 질투마저 사라질 정도의 날개를 달고 있던 사람. 그러면서 오히려 내 날개 때문에 눈이 부시다고 말하던 사람. 내 날개가 진짜건 가짜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나의 날개가 제 눈에는 너무나 예쁘다고 말해준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같이 날아보지 않겠느냐고.


 오랜만에 느껴보는 우정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잔뜩 뒤틀려 있었다. 열등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의 날개를 떼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나와 같은 눈높이를 가져보지 않을래. 너는 너무 순진해서 세상 무서운 줄을 몰라. 나는 그렇게 제 발로 소중한 인연을 차 버렸다. 


 ... 그런데 지금 왜 이 이야길 하고 있나.


 카페 뒷좌석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축구 중계가 다시금 귀를 파고든다. 그랬었지. 당신에게 요즘 내가 무엇으로부터 지쳤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무엇이 날 계속 되돌게 하는 걸까. 이 방황을 끝내줄 구원이 존재할까. 사실은 그저 마취라도 되고 싶어 아무렇게나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이러나저러나 어리석은 나비를 자처하고 마는 나. 내가 진정으로 갈구하는 것은 뭘까.


 지루함의 소멸일까.

 새로운 자극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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