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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teOE May 18. 2019

어떤 사랑의 시작에 대하여

영화 <라라 랜드>

까만 밤하늘 아래 말도 안 되게 반짝이는 별들은 누군가의 피곤이 어려있는 자동차의 전조등이거나, 단란하게 깨어있는 어느 저녁, 혹은 기계적으로 깜빡이는 불빛 일지 몰랐다. 하지만 당시의 내겐 그저 아름다운 야경일 뿐이었다. 인고의 시간 끝에 드디어 마주한 아름다운 빛의 물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이 바로 믿어지지가 않아 나는 부러 더 어색한 미소만 지은 채 앉아있었다.

저 멀리 어딘가에 박혀있는 차를 찾으러 언덕을 오르던 어느 영화 속 커플의 투덜거림처럼, 의미 없이 투닥이는 말들이 유리 오르골처럼 맑게 부서져 내렸다. 조금 더 가까워지는 기분, 두텁고 차가웠던 벽이 하나 둘 허물어지는 순간의 희열, 나는 그 순간을 설명할만한 정확한 비유를 아무래도 달리 찾을 수가 없다.

 | 어떤 시작.

정도이지 않을까. 돌아보고 나야 정의 내릴 수 있는 감정은 죄다 설렘이라는 단어를 붙여도 과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곧바로 파악할 수 없는 데다 정신을 차려보면 저도 모르게 끌려가고 있는 정체 모를 감정들의 연속.

어느 영화 속 아름다운 LA의 야경보다 더 환상적인 어떤 무대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마냥 신기하고 새로우면서도 어딘가 긴장되고 무서운 떨림이 동반되는 단막극. 두 사람이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되는 경험이라던 어느 철학자의 말이 떠오르며, 어딘가 낯간지러운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좀처럼 이렇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어떤 사랑의 시작.

예기치 못한 순간에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마법 말이다. 하지만 무방비 상태로 맞는 운석은 언제나 얼떨떨하기 그지없다. 갑작스러운 슬픔엔 도가 텄지만, 갑작스러운 행복엔 면역이 없었던 나는 극단적인 선택지만 떠올리고 만다. 행복을 감당할 수 없으니 일단 불행을 덧씌우고 보는 것이다. 내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형식으로 변환하는 작업이랄까. 수많은 경우의 수를 따지고 일어나지 않을 일에 가능성을 거는 등의 방어 작업이 동반되곤 한다.


그 사이.

정작 사랑이라는 감정 혹은 관계 혹은 대상은 저만치 뒤로 물러간다. 팔딱팔딱 살아 숨 쉬던 설렘은 느리고 긴 호흡으로 서서히 굳어간다.

그리고 결말.






갑작스러운 끝이 예견되면 우리는 재빨리 수백만 가지의 현실적인 이유와 논리적 설명을 덧붙여가며 합리적인 끝에 대해 고민한다. 그러나 모든 이별은 결국 시작과 같이 갑작스럽고 치명적일 뿐이다. 아리게 선명했던 사랑이 어느새 삶의 우선순위 변두리까지 쫓겨나면 그다음은 뻔한 수순 아니겠는가. 그때의 사랑은 마치 물 밖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헐떡이는 유약한 물고기만큼이나 나약하다.

이다지도 강력하고 이다지도 무력하다니.

그 누가 알았겠는가. 인간은 섬과 같아서 모든 관계는 섬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과 같다던 어느 심리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애써 터를 내렸던 다리를 철거하는 순간은 너무나 씁쓸하다. 사랑이라니. 효율성 측면에서 보자면 가장 할 짓 없고 이해 불가한 놀음의 연속이 아닌가. 게다가 마지막엔 반드시 후회하고, 회상하고, 자책하고, 마음 아픈 순간들을 겪어내야 한다. 나이 듦에 따라 연륜 있게 요령을 찾아보려 한대도 막상 그 순간을 마주하게 되면 배고픈 어린아이처럼 힘을 잃고 마는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 남은 것은 아름다운 밤하늘의 별처럼 잔뜩 미화된 기억뿐이다. 들춰봐야 어찌할 수 없는, 찬란하고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의 연속들. 그 짧은 경험을 다시 마주하기 위해 나는 매번 이 효율성 제로의 게임을 시작하고 기꺼이 목을 매단다.

나뿐만은 아닐 텐데.

그러나 무슨 말을 늘어놓아도 소용이 없음을 느낀다. 나와 같지 않은 마음의 상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저 고통일 뿐이기 때문이다. 순간을 사랑하고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자며 외로운 영혼을 스스로 다독일 밖에.

매번 실패해서 다소 부끄러울 지경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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