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삼십세>
서른이 되기 전까지의 삶은 군고구마 같았다.
가로로 눕혀진 드럼통에서 막 꺼낸 재투성이의 군고구마. 만지면 뜨거운 데다 손 마디마디에 검정 때가 묻고 도저히 아름답게 소화하기 힘든 형상인 주제에 드럽게 달달한 것. 날이 매섭게 추울 때여야만 더욱 찾게 되는 그것. 욕심내어 한 움큼 입안에 욱여넣었다가는 대번에 목이 매여 오는 것. 뭐 그런 그런 것들, 그렇게나 까다롭게 매력적인 것. 나는 달고 뜨겁고 샛노랗던 마음을 늘 차디찬 길거리 한가운데에 몰아넣고는 어디엔가 이렇게 외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를 좀 봐 달라고.
마음속 공허를 세상을 통해 채우겠다는 발상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모르고 나사를 열댓 개쯤 지구 반대편에 맡겨놓은 사람처럼 출처 모를 방향들을 향해 맹목적으로 최선을 다했다. 그 모습이란 게 마치 눈이 펑펑 내리는 한겨울, 인적이 드문 교차로에 가로로 눕혀진 낡은 드럼통, 그 안에 활활 타다 못해 까맣게 타들어간 제각기 형상의 군고구마들 같았다.
그렇게 삶은 내내 시렸고 나는 언제나 뜨거웠다.
그래서 봄이 올 수도 있다는 걸 몰랐다. 나 이외의 것들이 온기를 갖는 것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던 것이다. 눈이 녹아내리고 얼음이 깨어지고 심지어는 새싹 비스무리한 것들이 자라나는 형상을 보며, 부러 나는 이것 또한 나에게 내려진 새로운 저주이겠거니 하고 말았다. 기분 좋은 상상은 단 한 번도 맞은 적이 없었기에 그럴만했다. 낙관주의적 사고를 재수 옴 붙는 미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피했으니. 행복한 순간을 온전히 느끼는 것을 라면 3개 끓여먹는 것보다 못할 짓이라고 여겼던 버릇들이니. 돌이켜보면 좀 가엾다.
당연하게도 겨울이 지나면 봄이라는 계절이 찾아온다. 자연의 섭리란 그런 것이다. 내가 서른이라는 숫자에 집착을 한 건지, 그래서 자기 암시라도 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서른이 되었고 봄을 맞는 중이다.
온도는 뿜었다, 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이것은 지난 10대와 20대의 계절을 지난 내가 스스로 빚어낸 생명의 산물이다.
내가 가진 예민함이나 감정 기복, 공허함은 전혀 변하지 않았으나 내면의 변화가 가져다주는 소소한 행복이 놀랍다. 아주 오랜 동면에서 깨어난 심정으로, 나를 둘러싸고 있던 똑같은 환경을 마치 처음 겪어보는 사람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그 안에서 생명력과 온기를 느끼는 나 자신이 다소 낯설지만 싫지 않다.
나는 30년을 헤매고 나서야 나의 모든 선택은 100% 나의 의지와 책임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자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은 삶에 또 다른 자유를 선사해 준다. 내가 맞건 틀렸건, 내가 하는 모든 선택은 백 퍼센트 나의 의지. 나의 책임. 그래도 좋다는 확신의 3박자.
이쯤 되면 제 아무리 군고구마라도 30년쯤 세파를 쏘인 후 태양빛을 쪼여주면 나름의 광합성이 가능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농담이다.
한 고비는 한 계절이었고,
어느 계절이 와도
언제나 내 삶의 발자국은
내내 뜨거웠으면 좋겠다.
너는 사실 단 한 번도 네 뜻대로 하지 않은 적이 없어, 라며 웃던 친구의 말이 떠오르는 저녁에,
비 내리는 풍경을 보다 문득 끄적여 보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