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의 256GB 저장용량이 부족한 것에 대하여
회사에서 새로 받은 업무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사직서. 그 순간 나에게는 사직서가 무엇보다 절실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난 이제 어른이기 때문에 내 몫은 내가 챙겨야 한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깔끔히 주변 정리를 하고 싶어서 핸드폰 사진을 모두 지웠다.
구글이나 네이버 클라우드를 통해 백업 기능을 활용할 수도 있지만 일부는 그러지 못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내가 소중히 생각했던 일부 사진은 날아갔다. 사진을 모두 지우던 시점에 돌이켜보니 생각보다 한번 찍은 사진을 다시 보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 시간이 오래 지난 과거의 사진일수록 더 명백하다. 그러니 내 인생에 불필요한 사진들을 용량 256GB가 가득 차도록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나의 욕심이었다.
'선택한 사진을 지우시겠습니까?'
예를 누르기까지 조금 망설였다. 지우기를 누르고 휴지통에서 되살리는 기능이 있긴 하지만 선뜻 모든 사진을(추억을) 지우기가 쉽지 않았다. 실제로 일부는 휴지통에서 되살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가 예를 누른 이유는 이렇게 하면 머릿속이 조금 덜 복잡해지지 않을까 해서였다.
처음으로 모든 사진을 지운 날 내 마음이 홀가분해진 것을 경험했다. 마치 비 오는 날 우산이 없는데 마음을 비우고 시원하게 씻을 생각을 하며 비를 맞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단지 저장용량 부족으로 뜨던 알림이 잠잠해졌다는 정도?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작은 행동으로부터 나에 대한 신뢰감이 상승하는 계기가 되었다. 평소 사진 찍고 기록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이기에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부터 과부하로 터질 것 같은 머리에 새로운 저장용량이 생겨난 기분이었다. 뇌의 120%를 쓰고 있었는데 50%를 비우고 다시 절반은 새로운 지식으로 채울 수 있는 기분. 신기하고 짜릿한 경험이었다.
스마트폰을 사용한 뒤로 저장 용량은 점점 커지고 백업 기능은 다양해지고 있다. 그만큼 현대인들이 고퀄리티 사진을 많이 찍고 저장 용량이 부족해서 추가 금액을 내야 하는 백업 기능까지 사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더 좋게, 더 많이, 계속. 우리는 이 사태를 잘 소화하고 있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그렇지 못했다. 비싸고 무거운 DSLR을 대체할 만큼 좋아진 카메라가 휴대폰에 있는데 사용설명서를 대충 읽고 욕심만 내다가 오류가 난 것처럼.
새로운 제품을 사용할 때 제품설명서가 괜히 있는 게 아니듯 사람도 마찬가지다. 나에 대한 사용설명서는 나만 안다. 언제 배터리를 충전해 줘야 오래갈 수 있으며 어떤 연료를 써야 가장 효율적인지 계속 연구하고 갈고닦아야 한다. 스마트폰은 배터리가 방전되어도 충전기만으로 회복이 가능하지만 사람은 반드시 1% 이전에 충전을 해줘야 한다. 그러니 가끔은 이런 충동적인 방법이 통한다면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