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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SYSAILING Oct 07. 2021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세일링 크루즈 일상

작은 배 안에서 동고동락한 크루즈 동지들이 해산하고 3주가 지날 즈음, 단체 챗방에 사진 한 장이 올라왔습니다. 올해 처음으로 합류해 세일링 요트에서 크루즈라는 것을 경험한 친구가 크로아티아의 바닷가에서 보낸 사진이었습니다.


앵커 라이트(닻 내린 배가 마스트 꼭대기에 켜 놓는 조명)를 켠 세일링 요트들과 보름달을 조명삼아 모선으로 돌아가는 고무보트... 남친과 분위기 잡다 말고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을 수 밖에 없었다더군요.


비교적 번화한 만에 닻을 내리면 우리도 종종 육지로 마실을 가곤 했습니다. 아이스크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들뜬 어른 다섯이 3인용 텐더에 간신히 올라타 뭍에 닿으면 다들 엉덩이가 젖어있곤 했죠. 아이스크림은 바다에서 먹을 수 없는 음식 중 하나입니다. 화장실에선 간만에 콸콸콸 쓸수 있는 물에 감격하며 손을 씻기도 하고요. 육지에 발을 딛으면 흔들흔들 시작하는 땅멀미만큼, 그새 우리가 육지보다 바다에 익숙해져 있음을 느낍니다.


배 타고 떠돌던 바다는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이고 우린 배에서 내린지 한달이 채 되지 않은 참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치 전생의 일처럼 아득하고 동시에 찐하게 그리운 감정에 휩싸였습니다. 이날 크로아티아 바다의 저녁 풍경에 친구는, 바다 한 가운데 떠서 원시인같은 생활을 하던 때와 그 경험을 함께 나눈 우리가 그리운 마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 있다 채팅방에서 이 사진을 본 모두가 같은 마음이 되었을 겁니다.




럭셔리 휴양지도 '만만한' 세일러들

올해엔 다른 데에 좀 가 보자는 말이 나오긴 했으나 결국은 또 만만한 코르시카 섬에서 2주간 크루즈를 했습니다.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호수와 같은 지중해의 한 가운데에 동동 떠 있는 두 개의 섬 중 하나인 코르시카는 멀리 떨어진만큼 육지와 다른 풍광과 에메랄드처럼 맑은 물로 유명한 휴양지입니다. 나폴레옹이 코르시카 출신이라 유명하기도 하지요. 아래쪽의 섬 사르데냐와 함께 부자들의 고급 휴양지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유명한 수퍼요트들은 여름에 코르시카와 사르데냐에 가면 다 만날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만한 코르시카'라는 표현을 쓰면 오해를 사기 쉽상인데요, 사실 세일링 요트에게는 어느 바다든 다를 게 없습니다. 물과 음식을 배 가득 채워 출항하니 비싼 물가는 남의 얘기이고, 마리나에 입항하는 대신 만에 닻을 내린다면 정박료도 낼 일이 없거든요. 가끔 고무 보트나 수영으로 육지에 건너가 사 먹는 아이스크림 가격의 차이 정도는 흔쾌히 감수할 만 합니다.


보통, 도시에 사는 사람이 '천혜의 자연'을 만나기 위해서는 비행기를 타야 하게 마련인데요, 이탈리아 리구리아 해안에서 70마일 정도만 항해하면 코르시카에 닿을수 있습니다. 만만하다고 하는 이유는 이거였죠.

어려운 부분은 오히려 출발 전입니다. 매년 같은 멤버들이 출항하는데에도 배에 실을 음식 리스트를 두고 극성스런 토론이 휩쓸고 지나가거든요.


배 구석구석 식량을 채우고 물통과 기름통도 가득 채우고 아침 일찍 출항하면 보통 늦은 오후에 코르시카 섬에 도착합니다. 첫번째 닻을 내리고 첫번째 수영을 한 뒤 가장 유통기한이 짧은 음식으로 첫번째 저녁을 지어먹고 바다에서의 첫 밤을 보냅니다. 다음날부터 배에 탄 우리의 '전형적인 하루'는 이렇습니다:




아침: 널럴한 시작.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


새벽형 인간들과 아침잠 인간들이 섞여 있습니다. 일찍 일어나는 이들은 콕핏에서 멍때리거나 가져온 책을 읽으며 다른 사람들이 일어나기를 기다립니다. 모닝 수영을 하거나 싣고 온 SUP을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돌기도 합니다. 혹시나 일어나자마자 모닝*을 영접하러 화장실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필히 "물에 누구 있냐?"라고 묻는 게 룰입니다. 배 화장실은 그대로 바다로 배출되니까요.  아침 시간엔 웬만하면 다른 배 근처는 피해 수영하는 이유도 같습니다.

이 상태로 모닝*을 영접하면 안되겠죠?


차, 빵과 비스켓 등으로 간단히 아침을 먹으며 오늘 들를 곳들에 대해 얘기를 나눕니다. 좀더 놀 사람은 다시 물에 들어가기도 하고 책이나 지도로 정보를 좀더 알아보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다 닻을 올리고 출발합니다. 점심 닻내림 포인트는 10에서 20마일 정도 떨어진 곳으로 정합니다. 두세 시간 세일링할 거리입니다.

코르시카 섬의 모든 만 정보가 수록된 Portolana




점심: 천혜의 워터파크


좋은 곳은 자리 싸움이 나게 마련이므로 여유 있게 점심 포인트에 도착하는 것이 좋습니다. 코르시카는 물이 맑아 바람이 없으면 대체로 육안으로 해저가 확인 가능합니다. 해초가 있는 곳은 닻이 밀리거나 해초를 손상시키기도 하므로 모래밭을 골라 닻을 내립니다.


지중해의 여름은 기온이 높지만 바람이 건조합니다. 그래서 세일링 하는 동안은 더위를 잘 느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배를 멈추고 닻 내리는 짧은 시간 내에 바다로 뛰어들고 싶은 열망이 쌓이죠. 닻내림을 확인하자마자 다들 앞다투어 물로 뛰어듭니다.


신나게 물놀이 후 배에 올라오면 단물로 소금기만 제거하는 초간단 샤워를 하고 점심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날이 더우므로 점심은 대개 불 켜는 요리가 필요 없는 메뉴로 비교적 간단하게 합니다. 수영도 했고 밥도 먹었고 이제 낮잠을 자거나 빈둥거리며 쉬는 시간. 그러다 저녁 닻 포인트를 향해 다시 닻을 올리고 세일을 폅니다.


이번엔 밤을 보내야 하므로 좀더 신중하게 장소 선정을 합니다. 내일 아침까지 불 바람을 최대한 섬이 막아주는 방향의 지형을 고릅니다. 동풍이 분다면 동쪽이, 남풍이 분다면 남쪽이 막혀있는 만이 좋습니다. 해안선이 단순하면 옵션이 많지 않지만 코르시카의 장점 중 하나는 구불구불한 해안선 덕에 원하는 방향으로 열려있는 만을 쉽게 찾을수 있다는 점입니다.

닻을 확인하고 사다리를 내리자마자 또다시 물로 뛰어듭니다.


이번엔 시간이 좀더 많으므로 물에서 노는 시간이 좀더 깁니다. 수영이나 고무보트 등으로 해변에 건너갔다 오기도 합니다.

다만 해 지기 전에 배에 올라와 샤워를 해야 합니다. 배엔 헤어드라이어가 없으니 선선해지기 전에 머리가 다 말라야 하거든요. 우리가 승선한 40피트 배의 물통은 대략 400리터. 그런데 어떻게 다섯 명이 2주 동안 샤워를 하냐구요?


비밀은 세일러들이 바다에서 쓰는 특별한 샴푸에 있습니다. '바다샴푸(Sea shampoo)'라고 부르는데요, 흔히 집에서 쓰는 샴푸와 비슷해 보이지만 소금물에서 쓸수 있고 무엇보다 바다를 오염시키지 않습니다. 거품이 금새 자연분해 돼, 에메랄드처럼 맑은 바다에서 샤워를 해도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엄청난 장점이 있죠.

수영복이 비키니여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수영복을 입은채 씻고 샤워를 마친 뒤 콕핏에서 새 수영복으로  쉽게 갈아입을 수 있거든요. 젖은 상태로 실내에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화석 연료를 많이 쓰지 않는 세일링 요트는(아예 쓰지 않을수는 없습니다) 그 자체로 바다에서 다니는 이동수단 중 가장 환경친화적이지만 세일러들은 특히나 바다 환경에 민감합니다. 엄격한 룰을 스스로 지키는 세일러들은 만 가까이에 있을 때는 설걷이도 하지 않습니다. 바닷물로 간단히 세척이 가능한 것들만 처리하고 기름진 설거지는 개수대에 쌓아놓았다가 먼 바다로 나가 이동중일때만 세제를 사용하죠. 흔들리는 배 안에서 하는 설거지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저녁: 매일저녁 같은 곳을 바라보는 친구들

석양이 시작하면 수평선으로 나뉜 시야의 반을 차지하는 하늘이 붉은 색 공연을 시작합니다. 바다에 떠 있는 배에서는 수평선 아래의 물도 같은 색을 반사하므로 그야말로 온 세상이 붉게 물들죠. 콕핏의 시끌벅적한 수다가 멎고 그제야 찰랑찰랑 물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누가 먼저랄 거 없이 다들 지는 해에 시선을 고정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새삼 지구별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만끽하는 게 행운이란 생각도 들죠. 매일 저녁 맞이하지만 매번 새롭고 감동스럽습니다.


깜깜한 밤이 찾아오면 콕핏에 모여 대화밖에 할 게 없습니다. 별자리에 밝은 친구가 끼어 있으면 함께 별자리를 구분하고 은하수도 구경하며 누워 있기도 하죠. 다 큰 어른들이 이게 뭔일입니까.

그래서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이 하나라라도 있으면 내내 괴로울 수 있습니다. 매년 멤버의 변동이 거의 없이 같은 친구들과 함께 하죠. 결혼을 했더라도 짝꿍이 함께 승선하는 일도 드뭅니다. 긴 시간 이런 생활이 체질에 맞아야만 할 수 있거든요.


나이 찬 어른들이 함께 이렇게 오랜 시간 이렇게 작은 공간에 고립되어 바보같은 생각을 나누며 깔깔대다가 애들처럼 유치한 일로 다투기도 하며 24시간을 함께 하는 경험은 다른 곳에서 하기 어렵습니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한국에서 이탈리아에, 혹은 이탈리아에서 한국에 건너갈 때마다 평행우주를 건너는듯한 느낌이 드는데요, 비단 비행 시간이 길거나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서라기보다는 두 곳의 습관, 음식, 언어, 그 안에서 하는 생각조차 달라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일상으로 복귀한 뒤, 크루즈가 머나먼 옛날 일처럼 느껴지는 이유 역시 배 위의 생활이 도시의 삶과 그만큼 거리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배고프면 먹고, 눈이 즐거운 곳에 닻을 내리고 놀다가 바람이 불면 이동하고, 옆에 있는 이들과 웃고 떠들다 다투고 화해하고, 매일 해질녘엔 같은 석양, 달이 그믄 밤엔 같은 별을 보는 원초적인 공동 생활, 쉬워 보이지만 도시에 사는 이들이 하지 못하는 일들이니까요. 때때로 단순한 크루즈의 하루가 그리운 순간들이 있습니다.


반면 배 위에서는 아이스크림과 피자 같은 것들이 먹고 싶습니다. 정수리에 콸콸 쏟아지는 뜨거운 물로 제대로 된 샤워도 하고 싶고 강풍이 불어도 닻 밀릴 걱정 없이 포근한 침구에 싸여 푹 자고 싶기도 합니다. 심지어 운동화 신고 신나게 달리고 싶은 충동이 일 때도 있죠. 긴 크루즈가 끝나고 집에 갈 때는 설레이기도 합니다. 이를 어쩌나요?


두 가지를 한번에 누릴 수 없으니 그나마 왔다갔다라도 하는 게 최선 아닐까요? 매년 여름 바다로 돌아갈 것을 아니 크루즈를 떠올려도 맘이 덜 짠하고 곧 육지로 돌아갈 것을 알기에 배 위에서의 불편함도 감수할 수 있고요.


저는 한국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공항 안입니다. 곧 평행세계를 통과해 한국에 닿으면 당장 한국어 안내판부터 반갑게 눈에 들어오겠죠. 하지만 내년에 돌아올 것을 알기에 떠나는 이탈리아도 덜 아쉬울듯 합니다.

코모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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