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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해리 Jan 06. 2023

나의 자존심

아무 옷이나 입으면 안 됩니다

나는 아빠가 정장을 입은 모습이 좀처럼 기억나지 않는다. 아빠가 정장을 벗은 지도 13년의 시간을 넘어간다. 13년 전부터 아빠는 크게 더운 한여름을 제외하고 매일같이 유니클로 히트텍, 얇은 플란넬 셔츠, 질겨 보이지만 질이 좋아 보이지 않는 바지를 입었다. 겨울이 되면 패딩을 추가했다. 롱패딩은 아니었고, 어느 때는 얼마 입지 못하고 더 따뜻한 패딩을 찾았다. 아빠는 매번 춥다고 했다. 나는 그 점이 불만이었다: 아빠가 지금 찬 밥 더운 밥 가릴 때야? 남들처럼 긴 플리스를 입는 건 어떠냐고 했더니 ‘그건 너무 애 같다’며 단칼에 거절했다. 나의 까다로움이 어디에서 왔나 싶었더니 이게 다 아빠의 까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어떤 때는 옷을 직접 사서 갖다 주기도 했지만 도대체 옷을 어디에 팔아 버리는 건지 그 옷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었다.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아빠만 안다. 이 와중에 아빠의 옷장에서 낡아빠지거나 그나마 입을 만한 옷 외에 유일하게 자리를 조용하게 지키고 있는 옷이 하나 있었으니 그게 바로 코트였다.  

그러고 보면, 아무리 어릴 때라고 해도 나는 아빠가 어떤 옷을 입는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아니, 그보다도 아빠가 어떻게 옷을 입는지가 나의 관심사였다. 이른 아침, 나는 눈도 못 뜨겠는데 아빠는 새벽같이 일어나 셔츠를 아주 능숙하게 다림질하였다. 그 다림질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서 나는 듯하다. 그게 나의 아침 내음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아빠가 넥타이를 척척 매던 모습이다. 그렇게 정장을 착착 입고 

“아빠, 갖다 올게.”

말하는 아빠의 목소리가 귀에 선하다. 아빠는 참 깔끔하기도 해서 정장을 구겨 입는 걸 본 적이 없었다. 평상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엄마처럼, 이모처럼, 외할아버지처럼 아빠도 자신만의 패션 철학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나는 아빠가 13년 전에 어떤 옷을 입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뚜렷한 건 나는 아빠의 ‘그’ 옷이 아니라 ‘그렇게’ 입음에 자부심을 느꼈다. 

따라서 아빠의 옷장을 채우는 옷이 현저히 적어지거나 확연히 달라졌어도 아빠의 옷을 보면 아빠임을 느낀다. 아빠는 주로 검은색을 선택하였다. 히트텍도, 운동화도, 패딩도 검은색이었다. 와중에 셔츠는 회색이나 푸른 계열에 가까운 색상을 선택하였다. 아빠의 코트도 그와 비슷한 색깔이었다. 나는 가끔 아빠가 패딩 대신 코트를 입으면 그 시절의 아빠가 꼭 돌아온 것만 같다. 그렇지만 코트를 입는 계절은 겨울이고, 겨울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온을 위해 코트 대신 패딩을 선택하는 계절이다. 나는 아빠가 코트를 입으면 걱정이 되었다: 오늘 하루, 얼마나 추웠을까?

아빠의 코트를 보면 나는 대학 시절을 통틀어 처음 구매했던 코트가 연상된다. 연상된다고 하기엔 아직 집에 고이 있지만, 이젠 좀처럼 입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23살 1월엔가 탑텐에서 구매한 코트로 가격 대비 스타일이 나쁘지 않았다. 아빠의 코트처럼 회색 계열에 맞춤새가 나는 코트였다. 어디 입고 다니면 어디에서 구매했냐고 질문을 받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문제는, 그렇게 길지도 않은 코트가 어지간히 무거웠고 썩 따뜻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나에게 코트는 그뿐이었다. 나는 계절이 반대인 멜번에 갈 때 유일한 겉옷으로 내가 싫어하는 롱패딩 대신 그 코트를 들고 갔다. 그 무겁지만 따뜻하지 않은 코트를 입고 멜번의 칼바람과 세상의 냉혹에 부딪혔다. 똑똑히 기억난다, 되는 일 하나 없는 날의 연속과 긴장으로 숨이 터질 것 같은 공황, 차별과 냉대, 어떻게든 이겨내려는 깡으로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잠시 주저앉은 날. 나는 먼 나라로 와서야 약 10년 전부터 아빠가 겪었을 심정을 깨달았다. 그날, 살면서 수많은 울음을 경험하였지만, 처음으로 세상이 무너지듯 울었다. 그리하여, 아빠의 유일한 코트는 과연 아빠의 유일한 자존심일까. 운동화는 검은색이지만 구두는 광이 은은히 도는 갈색으로 고른 이유가, 훨씬 따뜻한 옷들을 두고 굳이 목 폴라에 셔츠를 갖춰 입는 이유가, 싸구려 옷을 꼬박꼬박 손빨래를 하고 세탁소에 드라이를 맡기는 이유가 바로 추운 날에도 코트를 입고 나가는 이유와 같을까 봐 나는 딸로서 마음이 아린다. 아빠가 정장을 입고 직장에 다녔던 시절, 나는 아빠가 지금처럼 옷을 입은 기억이 없다. 아빠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때처럼 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은 당신은 혹은, 왜 취직하지 않고 집에서 허송세월 하냐고 나에게 입으로 손가락질했던 사람은 날 욕하지 못한다. 내 글은 언제 빛을 볼까 마음 졸이며 집에서 글을 쓰는 동안 나는 허술한 코트를 입고 기구한 삶을 이끌고 돌아온 아빠를 위해 집을 덥혀 두고 식사를 준비했기 때문이다. 코트 안으로 바람이 숭숭 불어올지라도, 그 알량한 자존심은 나를 지키는 바람막이기 때문이다. 

“아빠, 왔어?”


바다만큼 이로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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