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월과 삼월 사이의 계절
책을 읽던 중에 목덜미와 어깨 한 편이 따뜻해졌다.
그러다 못해 이내 뜨거워졌다.
고개를 살짝 돌려보니 파리에도 봄이라는 음절과 꽤 닮은 풍경이
얄팍한 창문을 사이에 두고
둥근 나무 탁자 위로 마시던 커피와 함께 나란히 놓여 있었다.
봄이었다.
이월이 지나면 삼월이.
굳이 표현하면 겨울은 어느 정도 물러간 듯 했으며 봄이 슬슬 깨어나는 달. 두꺼운 외투를 이제 세탁소에 맡길까라는 고민을 시작하고 괜스레 밝고 얇은 옷을 꺼내어 입고 외출할까 망설이는 계절. 그 계절들의 간극을 머릿속으로 알고 있지만 왠지 모를 울렁거림 때문에 며칠은 불편한 마음으로 거리를 걷는다.
사이의 계절은 다른 시작의 초조함으로 인해 울렁거리는 것이라 믿었다. 학교를 다닐 때는 사람을 만나는 계절이었다. 한 해 동안 친하게 지나게 될 친구는 누구일까. 새로운 선생님은 어떤 분일까. 개학 전 날 밤새 뒤척이다 퀭한 눈으로 학교 앞 버들나무가 흔들리는 골목을 걸었다. 옅게 피어오른 버들나무 잎과 가지가 바람에 넝실거렸다. 흩날리는 봄의 흔적 아래로 사뿐히 한 걸음에 설레는 마음 하나씩 흘려가며 학교로 향하였다. 그러다 마음이 잘 맞는 친구를 사귀게 되면 그 날은 날아갈 듯 버들나무 앞을 뛰어 집으로 돌아가 엄마에게 하였다. 만나던 사람들이 곧 새로운 세상 자체 였던 나이. 겨우내 색채를 잃었던 뒷마당은 목련의 꽃망울로 시작해 조금씩 색을 갖추기 시작하고 촉촉한 땅 위로 민들레를 비롯한 들꽃들이 피어나기 꽃내음으로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조금씩 우리의 빛깔로 물들어 가기 시작하였다.
파리의 집에는 안뜰이 하나 있다. 그곳에 흙냄새로 가득 채울 만큼의 흙은 없지만 커다란 몇 개의 화분이 놓여있다. 파리의 집은 흔히 거리쪽 집과 안쪽 집으로 나뉘어지는데 노란집은 안뜰 쪽으로 창이 나 있는 집이다.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안 뜰을 꼭 지나야 만 하는데 유독 흙내음이 짙은 날이 있다. 그런 날은 꼭 비가 왔거나, 오는 날이었으며 파리에도 봄이 왔다 느껴졌던 순간이었다. 그런 날은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는 날. 없던 약속을 만들거나 일이 없더라도 어딘가를 걷다 집으로 들어간다. 그러고 보니 어제가 그랬던 날 이었다.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집까지 걸었는데 부족하다 싶어 발이 아플 때까지 걷던 길을 계속 걸었다. 부른 배보다 마음 어느 한편에 남은 울렁임을 지워야만 곤히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일 년은 네 개의 계절이라고 통상적으로 말은 하지만 사실 해마다 다르고, 계절의 종류도 무수하다 여긴다. 그 모든 것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이월과 삼월 사이의 계절은 조금 더 특별하고 여러 종류의 계절 중 가장 민감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하필 그 계절에 만나고 안녕한 탓에 어떠한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안녕한 이듬해. 나는 혼자서 서귀포의 어느 올레길을 걸었다. 이름 붙이지 않기로 시작한 첫 번째의 계절이었으며 동백꽃이 거의 저물던 계절이기도 했다. 붉고, 검기도 한 흙 위로 동뱇꽃잎들이 흩뿌려져 있었고 바다는 잔잔했다. 걷다 앉다 하기를 몇 번 반복하다 굽이 치는 해안가 곁으로 노을이 잘 보이는 곳에서 마지막으로 잠시 머물다 왔던 길을 되돌아 가기로 하였다.
멀리 보이는 제주의 바다는 저렇게 잔잔한데 마음의 감정은 한없이 울렁거렸다. 감정의 주인이 그것을 고스란히 나에게 남겨두고 간 탓에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것들을 꼬깃꼬깃 접어 어딘가 잘 쌓아 두려고 떠난 제주행이었다. 잔잔한 바다가 주는 편안함 때문인지 무언가의 착각에 빠져 동백꽃과 퍽 닮은 꽃 한 다발을 보내었다. 가장 먼저 봄을 손에다 쥐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리고도 한동안 수평선 너머를 응시하다 저물어 가는 해를 등지고 떠나온 산책길을 다시 밟아 나아갔다.
꽤 시간이 흘러 그 계절의 사이에서 지내고 있다. 흙내음이 나거나 꽃이 펴 늘 보던 풍경에 빛깔이 생기기 시작하면 마음이 울렁이기 시작한다. 잘 접어 숨겨두었다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었는지 이 계절이 찾아오면 어디선가 삐져나온 탓에 울렁거리는 마음을 다시금 추스르게 한다. 파리의 어느 조용한 카페에 앉아 밖을 멍하니 바라본다. 그러다 보면 울렁이는 마음 빛 위로 비치는 것은 그 날의 잔잔한 제주 바다와 흩뿌려진 동백 꽃잎이다. 그것들은 여전히 너로 인한 것이었고 나는 파리에서 울렁이는 어느 봄을 지나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