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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남방 May 10. 2021

다려진 팔레 로얄의 하늘

공간의 보통날


선선하다 느껴지는 바람은 들판을 태우고 지나온 햇볕이 옷깃 끝에 닿이기 시작할 때, 함께 찾아온다. 뜨거워진 거리에서 매일 맞던 바람이 이제는 선선하다 상대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하는 계절. 파리가 가장 빛나는 여름이 찾아온 것이다.





떠나기 며칠 전. 여행가방을 거실 한 복판에 펴두고 이것저것 던져 넣기 시작했다. 보낼 날을 손가락으로 헤아려보며 속옷과 양말부터 챙겨 넣는다. 그다음 바지, 셔츠 등 옷 따위를 챙기고 읽고 혹시나 누군가를 위해 두고 올 수 있는 몇 권의 책. 노트와 연필, 필름과 카메라. 한 두장의 수건과 세면도구를 대충 구겨 놓곤 다 챙긴 것 같다며 이제 빠진 게 무엇이 있는지 의자에 앉아 생각한다.

짧은 생각의 끝에 당장 떠오를 것 같다 판단되어 던져 놓았던 몇 개의 옷을 꺼내어 다림질을 시작한다. 구겨진 옷을 펴는 것은 여행을 떠나기 전 꼭 하는 습관 중 하나.


여전히 다림질을 잘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옷의 구김을 펴는 순간만큼 시간이 잘 가는 일이 또 없다. 옷 위로 물을 흩뿌린 후 나만의 방법으로 각을 잡아 구김을 편다. 그게 노하우 같은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보고 따라 해도 결국 원래대로 하게 되는 것이라 나만의 방법이라 일컫는다. 가끔 바지의 줄은 삐뚤 하며 셔츠의 어깨는 이상하게 돌아있기도 하다. 그래도 옷을 다려 여행가방에 조심스레 넣는 것은 여행지에서 성당을 찾아 아침 가장 이른 시간, 첫 미사를 드리는 일. 힘겹게 산을 올라 간 절에 조심스레 향을 붙이고 기도를 올리는 것과 비슷한, 떠나기 전의 성스러운 의식이다.


살결을 스치는 바람이 완연한 여름의 것이라 여겨진 아침이었다. 운동 후 부산스레 루브르 옆에 위치한 팔레 로얄 공원에 다녀왔다. 파리를 왔다면, 그것도 여행이라면 꼭 한 번쯤 가보라 말하고 싶은 공원. 루브르와 오페라 사이에 위치해 있음에도 숨겨진 탓에 많이들 놓치고 지나가는 곳이다. 이곳의 공원은 긴 사각형의 건물 안 뜰에 정제된 공간. 건물도, 프랑스식 창들도 심지어 나무들도 의도된 직각으로 전부 놓여있다. 나무에 달린 잎사귀 조차 정원사들에 의해 직사각형의 모양을 지니고 있다. 유일하게 '직선적'이 아닌 존재가 있는데 바로 긴 벤치에 적힌 한 문장의 시구들이다. 시나 글의 한 문장을 적어둔 진한 초록의 의자들. 가끔 혹은 자주 파리가 등장하는 영화나 잡지에서 볼 수 있다. 프랑스라는 나라는 꽤 '직선적'인 나라인데 그러한 공원에 유일하게 '곡선적'인 게 프랑스어로 적힌 시구들이라니. 그러기에 나에게 가장 파리 다운 공원을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이곳을 묘사한다.


꼭, 다리미로 다려둔 것 같은 묵직한 나뭇잎 아래 녹색의 의자를 가져와 놓는다. 자주 가는 카페에 들려 커피 한 잔과 책도 준비물로 챙겼다. 책을 몇 장 넘기다, 불어오는 바람과 주변의 풍경이 너무나 찬란해 커피를 야금야금 마시며 멍하니 하늘을 보았다. 투명한 하늘에 떠 있는 구름들은 바람이 움직이는 방향을 알려주었다. 떠내려 간다고 생각했던 구름들은 잠시 멈추었다 지나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였다. 정원사들이 각을 잡아 다려낸 것 같은 나무들은 그 바람에 의해 나의 머리 위에서 서로 치열히 부딪혔다. 나는 그 소리가 팔레 로얄 공원의 노랫소리라 멋대로 정하였다.


열두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 되면, 특히 오늘 같은 날은 의자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둥근 분수대에 둘러앉아 발을 올려두고 햇볕을 쬐며 책을 읽거나, 이야기를 나누거나, 짧은 낮잠을 잔다. 평일에도, 주말에도 이 곳 초여름의 풍경은 항상 동일하다. 그들 속에서 하나의 풍경이 된다. 그런 경쟁들을 보며 오늘도 꼭, 넉넉한 캠핑의자를 하나 구입할 거라 다짐한다. 그러다 얼마 전 사 입은 카키색의 여름옷은 이탈리아에서부터 왔는데 바람에 흔들리는 깃이 목을 간지럽히는 게 나쁘지 않아 다른 색의 옷을 하나 살까 쓸데없는 고민도 한다. 그렇게 하늘이 떠 다니는 구름과 닮은 생각들을 나열하다, 손등 끝에 닿이는 바람이 노르망디 옹플뢰흐의 부둣가에서 온몸으로 맞던 것과 꼭 닮은 것 같다는 생각들자 어이없게도 그 시간의 끝이 너에게 닿고야 말았다. 망설이다, 또 한 번 더 망설이다 이 곳에서 나란히 앉아 있고 싶어, 라고 적었던 문자와 첨부한 사진 한 장을 지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구름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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