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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나무 Dec 12. 2021

2021년 회고를 시작해(1)

봄과 비움 

봄이 오기 전에


올해는 아주 길고 깊은 호흡이기도, 쏜살같이 빠르게 흐른 시간이기도 하다. 1,2월 재택근무를 하며 몸을 회복하고 요양하던 나날들은 왜인지 또렷하고 마지막 출근날의 풍경도 생생한데, 어쩐지 머나먼 옛일 같기도 하다.


평소엔 그닥 좋아하지 않던 겨울의 꽁꽁 언 시간들 덕분에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봄이 오기 전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처럼, 새 삶을 피워내기 전에 죽음으로 돌아가는 꽃처럼 내게도 아주 간절한 잠이, 반드시 필요한 죽음이 되어준 계절이었다.



겨우 나를 돌아보기 시작한, 봄의 시작


쉬지 않던 머리를 멈추고 남은 생각들을 정리하던 1,2월이 지나고 어김없이 3월이 왔다. 봄꽃이 피어나며 나도 재가 된 나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온 나를 주섬주섬 줍기 시작했다. 동시에 여전히 회사에서 습득한 관성이 남아있던 모양인지 바로 가시적인 무언가 나타나길 바랐다. 얼른 이직을 해서 자리를 잡거나 적어도 명확한 목표 지점을 설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올해초 만든 나만의 1/4분기 OKR(Objective and Key Results, 목표설정도구)은 나름 성공적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목표’에 집착하는 지도 몰랐다. 


그러나 실컷 달려오던 바퀴를 뺀 당장은 그게 될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작년 한해동안 습관을 들여놓은 덕에 하루는 꽤 규칙적으로 흘러갔다. 모닝루틴과 리추얼을 이어가며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의미없이 나를 속이는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다그쳤다. 괜찮아 괜찮아, 하다가 정신차려, 하면서. 쓰고 나니 우습다. 무슨 지킬앤하이드야 뭐야. 


그럼에도 조금 안심할수 있었던 것은 얼마간의 퇴직금과 실업급여였다. 돈을 잘 아껴쓰면 6개월은 충분히 쉴 수 있었다. 2년 간 지독한 직장내 괴롭힘을 겪으면서도 꾸역꾸역 버티다가 결국 번아웃되어 돌아온 나에게 나는 우선 위안의 말을 건넸다. 괜찮아. 조금 쉬어도. 조급해질 것 없어. 멀리 가기 위해선 쉬어가야해, 하며.


그렇게 3월은 리추얼을 제외하곤 하고 싶었던 것들을 제약없이 마음껏 하며 보냈다. 나름의 2/4분기 OKR을 만들어놓긴 했지만 무엇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자유’가 내 첫 번째 목표였다. 웃긴 건 마구 하고 싶었던 것들이라는 게 고작 하루종일 책을 읽거나 누워서 뒹굴거리는 것, 잠을 실컷 자고, 해보고 싶었던 공부를 가볍게 시도해보는 것, 친구들을 만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게 전부였다는 거였다. 별로 대단할 것도 없었다. 뭘 그렇게 바라왔나 싶을 정도로.



4월의 통영ㅡ그 아름다운 순간


4월엔 통영 여행을 다녀왔다. 원래도 좋아하는 곳이긴 했지만 봄의 통영은 비할 데없이 아름다웠다. H와의 첫 여행이었는데 찰떡 같은 여행동지를 찾았다는 점 역시 통영의 큰 성과였다. 케이블카를 타고 미륵산에 올라 한려수도의 시리고 풍요로운 풍경을 눈과 가슴에 담았다. 낯선 길에 발자국을 새기고 그림 같은 책방에서 추억할 만한 책을 샀다. 시야에 온통 바다와 섬만 가득한 땅의 끝자락들을 밟았다. 때론 뜨겁고 때론 차가운 공기들을 와인과 함께 머금었다.


무엇보다 기억의 남는 두 가지 순간은 비진도와 박경리 기념관에서였다. 비진도는 통영까지 왔으니 섬 여행은 한 번 해야지, 하는 마음에 고른 가까운 섬이었다. 선착장에서부터 이어진 섬의 둘레길을 걷다 보면 양쪽이 판이한 바다를 끼고 있는 해변이 나온다. 우리는 그 앞에 있는 식당에서 회덮밥과 물회를 먹은 뒤 모래사장에 돗자리를 깔았다. 평일이어서였는지 관광객이 드물었다. 우리는 간만에 마스크를 벗은 채로 오래 걷고 웃었다. 공기가 이렇게 맛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바다 앞에서 와인을 마셨다. 바람이 꽤 거세게 부는 날이었는데도 우리가 앉은 쪽은 잔잔했다. 4월의 태양도 우리를 따스하게 맞아주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떨어지는, 인생의 몇 안되는 순간이라는 걸 그 순간에도 느끼고 있었다. 음악을 틀고 조잘조잘 떠들던 우리는 점차 침묵했다. 우리가 나눠갖는 이 시간의 의미를 되새김질하면서. 


마지막날 찾은 박경리기념관에서는 기대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한 풍경을 마주했다. 기념관을 한 바퀴 돌고 작가님 묘소가 있는 곳으로 나무 계단을 타고 올라가니 넓게 펼쳐진 유채꽃밭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이 살갗을 매만지고 지나가는 봄날의 유채꽃밭에는 꿀벌의 날개소리만 웅웅 울려퍼졌다. 작가님의 묘소는 동그랗고 작았다. 어쩐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며 몸을 돌리니 미륵산에서 보던 것만큼이나 아름다운 통영의 바다가 보였다. 우리는 그 아래 벤치에 나란히 앉아 한참동안 작가님과 같은 풍경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새로운 도전과 만남


서울에 돌아와선 새로 교육을 듣기 시작했다. 취업과 연계되는 강사 양성과정이었던지라 3개월 간 일주일에 4번 4시간씩 수업이 진행되었다. 아침마다 30분씩 걸어 4시간 수업을 듣고 다시 30분 걸어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고 오후 일과를 하는 식의 일상이 이어졌다. 일과라고 썼지만 사실 오후에는 여전히 특별한 게 없었다. 일주일에 두 번 피아노 학원에 갔고, 친구를 만나 저녁을 먹거나 책을 읽으며 혼술을 하고, 블로그에 글을 하나씩 포스팅하는 게 전부였다. 


어느덧 5월이야, 생각하며 따스한 풍요와 스믈스믈 올라오는 불안을 동시에 느끼는 봄이었다. 강사 교육과정에서 배우는 내용은 점점 다양하고 깊어졌다. 데면데면하던 수강생들과도 조금씩 말을 붙이고 모르는 것을 서로 물어보고 돕기 시작했다. 수강생들은 20대부터 50대까지 폭 넓은 연령대가 함께 했지만, 대부분은 나보다 5살에서 10살 이상 많은 언니들이었다. 사실 오히려 과정이 끝날 때쯤이 되어서야 몇몇 분들과 친해졌는데, 이때에도 멋있는 사람들, 닮고 싶은 인생 선배들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넘긴 인생의 큰 위기


5월 중순에는 이유모를 기력저하와 속쓰림, 두통이 동시에 찾아왔다. 스트레스나 체력적으로 무리한 것도 없는데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몸의 반항이었다. 처음에는 연유도 모른 채 무기력하게 구는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겼다. 어느 날 수업을 듣던 도중 어지럼증이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됐다. 겨우 집에 돌아와 바로 침대에 누워 잠에 들었다. 몇 번을 깼다 잠드는 동안 몸 상태가 점점 안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결국 고개조차 까딱하기 힘든 지경까지 갔고 다음날 아침까지 침대 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죽은 듯 잠만 잤다.


다음날 겨우 눈을 뜬 나는 병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에 침대에서 벗어났다. 분명 발로 땅을 짚었는데 몸이 와당탕 바닥에 쏟아졌다. 제대로 설 수도 없었다. 머리가 핑 돌았다. 침대 옆에 쭈그려앉아 있다가 의자와 탁자를 짚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12시간 이상 꼼짝도 못했던 지라 우선 물을 한 모금 마셨는데, 삼키자마자 격한 구역질이 올라왔다. 변기에 달려가 욱욱 거려봤자 나오는 건 없었다. 한 모음 더 먹어보려 해도 같은 반응이었다. 


걸어서 10분이면 가는 내과에 가기 위해 택시를 불렀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짧은 순간조차 서 있을 수 없었다. 겨우 의사를 만나 위염인 것 같다는 진단을 받고 수액을 맞았다. 40분 정도 수액을 맞으며 누워있는 동안은 몸이 조금 나아진 것 같단 착각을 했다. 그러나 약사에게 처방전을 내밀고 의자 위에 앉아서조차 낑낑대는 것을 보고 생각을 접었다. 다시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약을 먹으려면 밥부터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겨우 미역국을 데워 먹고 약을 먹는 데까지 꼬박 1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약까지 먹고 다시 잠만 잤다. 다음날 몸 움직이는 것은 조금 수월해졌으나 여전히 속이 쓰리고 머리가 아팠다. 


그후로도 혹시 이석증이 아닐까 싶어 이비인후과에 갔다가 허탕을 치고 위염약만 꼬박 먹었다. 알 수 없는 무기력증과 체력저하, 속쓰림, 두통의 원인이 사실 A형 간염 때문이었다는 걸 깨달은 것은 이미 몸이 거진 회복되고 난 뒤였다. 의사가 초진을 제대로 못한 때문이기도 했으나, 워낙 증세가 복합적이라 이해할 만한 거기도 했다.


결국 입원하지 않고 약만 먹으며 피 검사를 두 번 받고 나서야 간이 정상 수치에 돌아온 나에게 의사는 “새벽나무님은 본인도 모르게 인생의 아주 커다란 위기를 이겨내신 거에요.” 했다. 나는 그 앞에서 빵 터져 웃었다. 속으로 ‘당신도 몰랐잖아.’ 하며. 


그렇게 2주 만에 간염을 뚝딱 이겨낸 나는 지난해부터 시작된 잦은 병원 투어에 새삼 나이 먹는다는 감각을 체화했다. 여전히 마냥 어리고 서툰 나의 정신과 달리 몸은 착실히 매년 매 달 그리고 매일을 나이 먹어가는 구나. 그런 깨달음이었다. 



5월에 계획했던 일들은 한 달의 반을 앓고 회복하는 데 쓰는 바람에 제대로 이뤄낸 것이 없었다. 동시에 나는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을 이루었고 지켜냈다. 작년 말부터 6개월 동안 반복해서 내게 오는 메시지는 단 하나였고, 아주 명확했다. 사실 아주 뻔한 것이기도 했다.


결국 모든 것은 건강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
그냥 표면적으로 건강한 몸 자체일 뿐만 아니라 내가 나를,
내 마음과 내 몸을 돌보고, 그것을 최우선으로 두고 충분히 그리고
사려깊은 관심을 통해 지켜내야 한다는 것. 

나의 봄은 그렇게, 한없이 비우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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