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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나무 Dec 26. 2021

2021년 회고를 시작해(2)

여름과 시작

끝은 시작과 같은 말이다. 마찬가지로 비워내는 것은 동시에 채우는 일이기도 했다. 봄을 실컷 비운 나는 여름을 가득 채워보기로 했다. 다만 지금까지 하던 방식 말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새롭고 낯선 길로.



소설 쓰기의 기쁨과 슬픔


 6월, 여름의 시작과 함께 창비학당의 소설 쓰기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이상한 마음으로 소설 쓰기’라는 다소 요상한 제목의 수업이었다. 지난 5월, 더숲 문학 상담실에서 권민경 시인님을 만나 글에 대한 고민을 줄줄 늘어놓은 적 있었다. 그녀는 내게 소설 수업을 추천했다. 과연 집에 와서 찾아보니 여러 플랫폼의 클래스가 다양하게도 있었다. 그중 가장 합리적이고(가격) 편리한(온라인) 수업을 고른 것이었다. 


 6주 동안 진행되는 수업에는 마지막 3주 간의 합평도 포함돼 있었다. 처음 3주는 수업을 맡은 최영건 작가님이 소설 작문과 관련된 책(H. 포터 애벗, <서사학 강의>)을 요약, 발제, 설명해주었고, 여러 예제(천선란, 아니 에르노 등의 문장들)를 소개해주었다. 


 강의를 듣는 3주 동안 새로운 배움, 확장되는 경험에 대한 즐거움이 온몸을 휘감았다. 손가락 끝이 저릴 정도로 짜릿했다. 오래도록 멀리 두고 있던 문학의 세계에 발목을 담근 기분이었다. 한동안 버려둔 나를 다시 찾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뽕 맞은 것처럼 4주 간 신나게 소설을 써 내려갔다. 어느 날 기사를 읽다 소재를 찾았고, 거기에 상상 속 이야기를 덧붙여 써 내려가는 동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초고는 손가락 끝에서 마법처럼 술술 나왔다. 카페와 집을 오가며 실컷 썼고, 쓰지 않는 날에도 머릿속에서 등장인물들과 대화를 나눴다. 


 드디어 내 소설을 합평하는 날이었다. 초고라 러프한 수준이었지만 앞부분은 문장도 몇 번 다듬었다. 부끄러웠지만 어딘가 자랑스럽기도 했다. 작가님은 1시간 넘게 나의 소설을 아주 꼼꼼히 분석하고 샅샅이 의미를 드잡아냈다. 여러 지적들과 동시에 상냥한 의견도 덧붙였다. 나도 몰랐던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해석해주는 동안 내 손가락은 피드백을 쫓아가기 바빴다. 그야말로 황홀한 시간이었는데, 


 어찌 된 모양인지 그 후로 그 소설을 다시 들여다볼 수 없었다. 끔찍했다. 4주 동안 정신없이 신나게 썼는데, 정성 어린 피드백에 부끄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자신감이 솟기도 했는데, 그랬다.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다시 들여다보는 게 괴로웠다. 그쯤 되니 많은 작가들이 몇 번이고 반복하고 강조하는 말이 떠올랐다.


 진짜 힘든 단계는 퇴고다.
퇴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작가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수업이 끝나고 한 달 뒤 권민경 시인님을 다시 찾아갔다. 소설을 보여드렸고 역시나 소중한 피드백을 들었다. 최영건 작가님과 또 다른 시선과 관점으로 던져준 의견과 지적 역시 좋았다. 그러나 나는 그 글을 다시 고치지 못했다. 결국, 완성하지 못했다. 여전히.




그럼에도 읽고 쓰겠다는 다짐


 6월에는 소설 수업과 동시에 독서모임을 시작하기도 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 도서관에서 독서모임 지원사업 공고가 뜬 것이다. 책 읽으라고 돈을 준다니 이거야 말로 나를 위한 사업이었다. 오랜 동네 친구들을 꼬셔 모임을 꾸렸다. 


 든든한 자금 지원과 함께 우리는 6개월간 4권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빤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우리 사이에서도 낯선 발견의 순간들이 있었다. 그 오랜 시간 한 번도 나눠본 적 없는 이야기를 꺼내고, 생각을 공유하며 색다른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우리는 여성주의, 그러니까 페미니즘 도서들*을 골라 읽었다. 여성으로서 살아온 우리의 이야기를ㅡ어째서인지 이전엔 깊이 해본 적 없는ㅡ나누고 공감대를 굳혔다. 

*<아무튼, 언니(원도)>,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양귀자)>, <나는 당당한 페미니스트가 되기로 했다(린디 웨스트)>


 그렇게 특별하면서도 느슨한 모임을 이어갔고, 동시에 다른 글쓰기 모임에도 나갔다. 책 읽기는 익숙한 사람들, 글쓰기는 낯선 사람들과 했다. 여전히 서툴렀지만 때론 꽤 마음에 드는 글을 쓰기도 했다. 나의 소설 쓰기는 이미 실패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지만 나는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새로운 성장의 길


 4월에 시작한 강사 양성과정도 끝을 앞두고 있었다. 설렁설렁 듣다가 막상 끝난다고 하니 퍽 섭섭한 기분이 되었다. 뒤늦게 친해진 수강생들과 헤어진다는 것도 아쉬웠다. 그래도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길을 함께 걸을 동료가 된 셈이었다. 아쉬움보다 기쁜 마음이 컸다.


 3개월 간 다양한 것들을 배우긴 했지만 당장 이걸로 취업해 돈을 벌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학부 때 졸업을 앞두고 피어오른 막막함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센터에서 우릴 서포트해주던 취업 담당 선생님께는 그조차 한가한 소리였다. 그녀는 수강생 한 명 한 명에게 맞는 일자리를 찾아 제안하고 다독이며, 수료와 함께 필드에서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었다. 


 나 역시 그녀의 도움을 받아 이곳저곳 이력서도 넣고 면접도 보았다. 어쨌거나 그 분야에서 나는 이제 막 발을 들인 ‘뉴비’에 불과했다. 1차 서류에서 ‘광탈’하기도, 왕복 3시간을 가서 고작 30분 면접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사실 자타공인 ‘프로퇴사러’로서 그게 딱히 힘들진 없었다. 그래서 인생은 그 어떤 것보다 경험치가 중요한 게임이기도 하다. 


수료한 지 한 달, 내게는 세 개의 계약서가 생겼다. 

 시간 강사일 뿐이었지만 아이들에겐 또 한 명의 ‘선생님’이 되는 일이었다. 만만하게 본 건 아니었지만 추상적으로 생각한 어려움과는 전혀 다른 난관들이 있기도 했다. 처음 몇 주 학교 수업을 할 때에는 그 여름의 태양처럼 뜨겁게 땀을 흘리기도 했다. 에어컨이 빵빵한 교실 안에서도 혼자 절절 헤맸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서툰 선생님을 따스하게 맞아주고 관대하게 기다려주었다. 나는 그들의 자비에 기대어 매일 조금씩 성장해가고 있다. 




어떤 우연


 6월 말에는 또 다른 기회와도 마주했다. 동네 도서관에서 주워 온 소식지에 ‘청년 일자리 경험 사업’이라는 게 있었다. 나라에서 정하는 청년의 기준은 만 34세일 때도, 만 39세일 때도 있었으나, 어쨌거나 내겐 몇 년 남지 않은 알짜배기 사업들이었다. 


 마침 백수의 신분이었던 내게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 기회는 그 자체로 귀했다. 사실 큰 기대 없이 사업 OT 자리에 참여했다. 동네에 있는 줄도 몰랐던 작은 청년지원센터였다. 연계 일자리 리스트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분야의 기업과 사회적 경제 단체, 기관들이 있었다. 긴가민가하는 마음으로 몇 군데 흥미가 가는 곳을 골랐다.


 그렇게 나는 작은 동네 책방에서 일하게 되었다. 책방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쓰면서도 어색한 것은 책방조차 ‘노마드’였기 때문이다. 대학로에 오랜 터줏대감이었던 책방은 코로나로 인한 경영 악화로 어쩔 수 없이 공간을 정리했다. 그 이후 다른 책방의 셋방살이를 하며 온라인 중심의 북클럽 운영 등 여러 시도와 도전을 하던 중이었다. 


 때문에 어수선하긴 했으나 동시에 이제 막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책방 곁에서 나 역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울 수 있었다. 책방조차 나와 닮았단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해왔던 관성 같은 일을 놓고, 두렵고 낯설지만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가 보는 과정에 있다는 점에서.


 청년 일자리 경험 사업은 3개월짜리였지만 나는 그 이후에도 책방에 남아 일을 하고 있다. 여전히 여러 방향으로 헤매기도 하고, 도전해보기도 하고, 그 와중에 나름 자랑할 만한 성과를 만들어 낸 책방에서. 여전히 서툴고 헤매고 넘어지고 방황하면서도 계속 나아가 보는 나로서, 말이다.




어떤 이별


 여름의 끝자락엔 생각해 본 적 없는 이별이 있었다. 아니 분명 언젠간 올 거라는 걸 알았으면서 모른 척하고 있던 이별이었다. 코로나 핑계로 1년 넘게 얼굴도 잘 보지 못했던 할머니의 죽음이었다.  


 내내 장례식장에 멍하니 있다 입관식이 되어서야 겨우 본 할머니의 얼굴은 뽀얗고 고왔다. 할아버지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연신 쓰다듬으며 통곡을 했다. 나는 그녀의 어깨만 겨우 살짝 쥐었다 놓았다. 여전히 부드럽고 말랑한 어깨였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간 그녀의 묘 앞에 노오란 나비가 와서 한참을 앉아있다 날아갔다고 한다. 다음날 학교 첫 수업이 있다는 핑계로 먼저 돌아온 나는 엄마가 보내준 사진 속 나비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잘 가요, 조심히 가요, 겨우 전해보며. 




 여름엔 뜨겁게 불타오르면서도 상쾌했던 강릉에 다녀오기도 했다. 단오제를 맞춰간 거였는데, 코로나 때문에 행사장 규모는 소박했으나 나름 축제라고 들뜨고 신났다. 지난봄의 통영 이후 나의 좋은 여행 파트너 H와 함께였다. 그녀와 안목부터 강문까지 해변 옆으로 이어지는 소나무 숲길을 말없이 한참 걸었다. 오래 기억에 남는 순간들은 신기하게도 대개 그런 장면들이었다. 


 수많은 대화 속 잠깐의 침묵, 그리고 걸음, 각각의 태양과 바람, 바다 같은 것들. 


 나의 여름은 수많은 시작과 끝이 파도처럼 부딪치는 계절이었다. 매 순간 만남과 이별이 있었다. 얼핏 보면 제자리에 있는 것 같았지만, 자세히 보면 파도와 함께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흐르다 닿게 될 곳이 뭍 일지, 거대한 대서양의 한가운데 일지는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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