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시간이자 기적의 공식이다.
2019.04.22 ㅡ
1. 오늘은 하진이가 태어난 지 99일 되는 날이다. 바로 엊그제 병원 대기실에서 발 동동거리며 아내의 수술이 잘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것 같은데, 그로부터 99일이 지났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날의 감정은 아직도 생생하다. 며칠이, 아니 몇 년이 지나야 희미해질 기억일까? 여러 잊을 수 없는 기억들 중에 하나일 듯하다. 그날 아내와 같이 흘렸던 눈물은, 함께 나눴던 기쁨은.
100일을 하루 앞두고 그동안을 돌아보면, 짧은 시간 동안 참 여러 차례 마음을 졸였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 전에 내가 생각했던 아이를 키우며 겪을 가장 당황스러운 일은 '아이가 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진이가 태어났고, 나와 아내는 깨달았다. 아이가 울고, 마음처럼 달래지지 않는 것은 가장 흔하게, 자주 만나볼 수 있는 '디폴트 값'이었다는 것을.
덕분에 매 순간이 걱정과 당황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불행 중 다행으로 하진이는 딱 두 가지 순간에만 울었다.
배고플 때는 아내가 수시로 시간을 체크하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고 수유를 하거나 분유를 먹이면 언제 울었냐는 듯 눈을 꼬옥 감고 먹는데 집중했다. 요즘에는 더 귀엽게 엄마의 옷자락을 잡는다거나 젖병을 들고 있는 엄마의 손가락을 쥐고 먹는다.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직접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모습이다.
재워달라는 투정은 요 녀석이 이제 뭐가 편한지, 뭐가 좋고 싫은지에 대한 호불호가 생겨나고 있다는 의미이다. 하진이는 누워서 등을 대고 자는 것보다 엎드려서 자는 것을 좋아하고, 엎드려서 자기 이전에 엄마나 아빠가 안아서 재워주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한참 깔깔대고 놀다가 잠이 오면 칭얼대며 안아달라고 신호를 보낸다. 그럼 아내나 내가 아가띠를 두르는데 하진이는 이미 '아가띠를 두르는' 그 행위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눈치. 헐떡헐떡 거리며 '당장 안아주지 않으면 나 울지도 몰라요?'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래서 얼른 안아 아가띠에 넣으면 채 1분도 걸리지 않고 새근거리며 잠이 든다. 이 작고 귀여운 아기가 벌써 좋고 싫음이 생겨난다는 사실이 그저 신기하고 사랑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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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많은 걱정을 했다. '등센서'에 대해 걱정할 때는 우리 아이가 계속 누워있기 싫어하면 어떡하지, 하며 고민했고, '수면 패턴'에 대해 걱정할 때 하진이는 평생 1시간만 자고 깨어나는 패턴을 반복할 것만 같았다.
물론 아직 생후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아기는 많은 것들이 불완전하다. 겨우 잡아놓은 패턴이 금방 흐트러지기도 하며 하루 낮 동안 잘 자면 밤잠을 설쳐 힘들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하진이는 이제 혼자 누워서 모빌을 보거나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수유 쿠션 가득한 별 무늬를 보며 중얼중얼거리거나 혼자 키득거리기도 한다. 바운서에 앉혀 놓으면 엄마가 설거지하거나 밥을 먹는 동안 기다려주기도 하는 등 우리 걱정과는 다르게 스스로 잘 해내고 있다. 물론 스스로 해냈다기엔 아내의 고생과 노력이 무척 컸지만.
한 시간 자고 깨고, 모유를 먹고 한 시간 자고 깨는 '밤수' 패턴을 반복하던 하진이가 처음으로 세 시간 동안 곤히 잤던 날 밤이 있었다. 아침에 아내와 수면 기록 시간을 확인하며 무척이나 기뻐했다. 겨우 두어 시간 더 잤을 뿐인데도 우리에겐 기적 같은 일이었고 아름다운 변화였다. 물론 그 날 이후에 또 깊게 자지 않아서 아내의 골머리를 썩게 했지만 충분히 '100일의 기적'을 떠올릴 수 있었던 긍정적인 신호였다. 어젯밤에는 5시간을 연속으로 자기도 했고, 이제 밤수는 1회에서 2회 정도로 줄였다. 하진이는 먹는 양이 늘었고, 그만큼 먹는 횟수는 줄어들고 있다. 점점 하루 3끼를 먹는 패턴이 갖춰지겠지, 사람처럼!
흔히들 '100일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100일이 지나면 점점 아이가 밤에 자는 시간도 늘어나고 밤수도 거의 하지 않게 돼 이때까지 쪽잠을 자는 엄마들이 깊은 밤잠을 잘 수 있게 되는 시기가 이때다. 물론 또 다른 힘든 일들은 쉬지 않고 일어나지만 대부분의 아내들이 그렇듯 나의 아내도 '잠을 잘 잘 수 있는 것'만으로도 아침의 컨디션이 다르다고 말한다. 이렇게 100일은 엄마들의 1차 목표이자 반환점 같기도, 희망의 깃발 같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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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내와 나는 '100일' 파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요즘은 '돌잔치도 민폐야'라고 하는 세상에서 누구를 초대해서 100일 잔치를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물론 우리 부부도 100일 잔치에 초대받았던 기억은 없고. 하지만 첫 아이의 100일을 특별하게 보내고 싶었던 우리는 아이의 예쁜 옷도 고르고, 집에서 간단한 100일 상을 차려서 사진으로 남기기로 했다. 물론 예약한 스튜디오에서 전문 사진가를 통해 촬영을 하긴 하겠지만 엄마가 준비한 100일상 앞에서 가족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것도 뜻깊을 것 같았다. 내일이 하진이의 100일이지만 평일인 관계로 주말에 부모님이 우리 집으로 놀러 오기로 했다. 아내와 나는 풍선, 의상, 떡, 소품 등을 준비하며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아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아내가 웃으며 들려준 이야기는 단순한 생존 그 이전의 특별한 이야기였다.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보내는 10개월 가까이 되는 시간, 즉 280일에 생후 100일을 더하면 380일이 나오고 그 앞에 배란일 15일을 빼면 정확히 365일이 나온다. 그 말인즉, 하진이라는 생명이 이 지구에, 우리 가족에게 존재하게 된 지 1년이 되는 날이라는 의미다. 즉 약 365일 전, 하진이는 존재하기 시작했다.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듣는데 뭔가 뭉클했다. 아 그랬구나... 하진이가 태어난 지 100일이 됐을 뿐, 그 한참 전부터 우리와 함께 있었지. 아내가 임신했을 때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조산 위험이 있었고, 임신성 당뇨로 고생했고, 아이가 너무 커서 오히려 막판에 고생했던 기억들. 태교를 하고 싶었지만 조산 위험 산모로 화장실 가고 밥 먹을 때 빼고 누워있어야 해서 근교로 바람 쐬러 가는 것조차 못 했던 아내. 버티고 버텨내 하진이라는 선물이 우리에게 온 지 이제 100일이 되어간다고 생각하니 새삼 감동스러웠다.
하진이는 지난 몇 주간 엄마 아빠의 지인들의 결혼식을 따라다니며 예쁨도 많이 받고, 신기한 경험도 많이 했다. 결혼식에 갈 때는 아내와 나의 결혼 이야기를 들려줬고, 벚꽃을 보러 갔을 때는 꽃을 만져보게 하며 우리의 데이트하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약수터 할머니들이 '장군감이네', '장군으로는 부족하네'라는 등 덕담을 한가득 쏟아내자 하진이는 방긋방긋 웃으며 화답해주기도 했다. 참 많이 컸다, 싶은 지난 99일이었다.
100일을 기점으로 더 많은 성장과 변화를 겪을 하진이가 걱정된다. 기대된다. 그 변화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내가 바보 같고 겁이 난다. 하지만 아내는 지금처럼이나 든든하게 하진이를 안아줄 것이고 나는 아내가 의지할 수 있는 남편일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나를 놀려대는 아내를 한 번, 하진이를 한 번 바라보며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나를 낯설어할 수도 있구나. 딱히 속상하거나 서운하지는 않았다. 나도 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가 출근할 때 "우리 집에 또 놀러 오세요."라고 말해 아버지를 엄청 섭섭하게 만들었다고 하니까. 하진이는 나를 낯설어할 때까지 자랄 것이고, 그 이후로도 계속 자라 다시 내게 안길 것이고, 나를 아빠라고 부르며 의지하고 모방하고 질투하고 사랑할 테니까.
나는 다만 사랑해 줄 뿐이다.
이 아이가 지금처럼 계속 자라도록.
건강한 어른으로, 사랑하며 사랑받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도록 지켜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