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일이면 잘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
너는 얼마 했어?
글쎄, 나는 5억?
나는 이번에 9억.
'카피 앤 페이스트’ 매직이 있긴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성분들이 써진 패키지를 계속 보고 있자니 더 이상 문자가 아니요, 그림이다. ㅓ와 ㅕ의 한 획 차이로 폐기물이 되는 것은 패키지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제품의 패키지 디자인에서 보기 좋은 것만큼 중요한 것은 것은 정확한 정보 전달이다. 아무리 디자인이 잘 나와도 정보가 틀린 제품은 판매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확인하고 빛을 보는 제품이지만 그 마지막에 큰일을 내는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혼자가 아니라 그런 것일까? 농담 식으로 주고받는 소위 말하는 ‘해 먹은 금액’을 웃으며 말하는 선배들의 정신적 해탈에 박수를 보낼 뿐이었다.
평소와 같이 패키지 위에 놓인 깨알 같은 글씨를 검수하며 문득 드는 질문이 있었다. 나는 화장품, 음식, 생활용품 등 살 때, 무엇을 보고 사더라. 굳이 대답을 해보자면 내 피부에 맞는 화장품, 맛있는 음식, 향기가 좋은 샴푸…?
ㅓ인지 ㅕ인지 보면서 인턴은 깨닫게 되었다. 본인은 그다지 패키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피부에 잘 맞으면 패키지가 별로라도 쓸 것이고, JMT 음식이면 포장이 영 아니라고 해도 상관이 없으며, 샴푸 용기가 별로라고 해서 좋은 향을 포기하진 않을 것이다. 물론 패키지가 예쁘기까지 하면 더 좋겠지만, 안에 든 것이 마음에 든다면 패키지야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나였다. 그에 반해 내용이 썩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보기 좋은 패키지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나는 아니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좀 충격이었다.
너무 근사해 보였던 일, 그래서 무작정해보고 싶었던 일이 정작 삶에서는 무관심 영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관심이 많아도 일을 잘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없는 걸 만들어서 끄집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저 이 일이 멋있어 보여서 하고 싶었던 어린날의 나는 정작 본인의 관심사와 가치관, 그리고 성향에 맞는 일인지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목업을 새로 만들려고 석고를 저을 때마다 환경오염인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고, 스치면 지나칠 것 같은 스티커 배경 패턴 20종 투표를 위한 숨은 그림 찾기가 일단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인턴 디자이너는 그렇게 하고 싶었던 일을 서서히, 단호하게 떠나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