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을 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람을 우리가 소위 '천재'라 부르는 이유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 모두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모두 자기만의 우물 속에 살고 있다. 우물의 크기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사고는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우물 안의 내용을 기반으로 한다. 그렇기에 다름을 공감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내 우물 밖의 다름이라면,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최근 다름을 인지하는 순간, 다름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고 있다. 그 순간에 난 논쟁 아닌 논쟁을 벌이거나, 다름을 회피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그때의 상황을 반추하며 다름을 이해하고, 그때의 나를 반성하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조금만 더 나를 내려놓았다면, 그 당시에 더 좋은 대화를 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나의 가치관을 갇히지 않으려는 연습을 하고 있다. 물론 아직 한참 멀었지만.
그래서 그녀는 말한다. 우리는 괴물이 아니라 교육받은 계급의 일원이라고. 우리가 겪은 실패는 상상력의 실패, 공감의 실패라고. 우리는 이런 현실을 마음 깊숙이 담아두는 데 실패해 왔다고.
- 타인의 고통 中
전쟁과 연민 그리고 공감의 실패
<타인의 고통>에서 수전 손택 작가는 전쟁 사진을 중심으로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린 과연 타인의 고통을 얼마나 진심으로, 깊이 있게 공감하고 있을까? 작가는 전쟁이란 끔찍한 사건과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받고 있는 지역의 사람들을 다루는 대중매체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우리는 대중매체가 전하는 고통을 보고 연민을 느낀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고통에 우리가 공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전쟁을 경험해 보지 못한 우리가, 여행을 가지 못하는 것에 힘들어하고, 경제적 문제로 고민하며 살고 있는 우리가 그들의 고통을 정말 공감하고 있을까? 앞서 말했듯, 우리는 보통 누군가에게 공감하기 위해 '나'의 경험을 사용한다. 나의 경험을 기반으로 누군가의 경험이 얼마나 행복할지, 고통스러울지 상상한다.
- '부모님과 싸웠다고? 내가 부모님과 싸웠을 때는 이런 기분이었는데. 이 친구도 그럼 지금 이런 기분이겠구나... 힘들겠다...'
- '어제 정말 소중한 친구와 싸웠다고? 난 소중한 친구랑은 싸운 적이 없는데... 보통 친구랑 싸웠을 때는 이런 기분이니까.. 이 기분보단 좀 더 슬프겠다..."
우리는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각각의 상황은 스펙터클로 변신해야만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즉, 흥미롭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스스로 이미지가 되기를, 즉 유명 인사가 되기를 갈망한다. 이렇게 현실은 위신을 잃어버렸고, 따라서 재현만이 남게 된다는 것이다. 대중매체를 통한 재현 말이다.
- 타인의 고통 中
즉, 공감은 나의 경험과 상상을 통해 그 사람과 나를 일체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만약 그 고통을 제대로 상상하지 못한다면. 공감은 왜곡되거나, 공감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가 고통받는 이들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하는데 실패했다고 말한다.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우리가 그들의 삶을 제대로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린 교육을 받았지만 그들의 고통의 크기를 나의 고통으로 상상하고, 그래서 우린 연민에 그칠 뿐, 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저자는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과 일체화하는 것이 아닌, 타인의 고통 그 자체로 바라봐야 한다고 역설한다. 나의 경험, 나의 판단이 아닌, 그들의 고통을 그 자체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은 '타인'의 고통이다. '우리'의 고통이 아니다. '우리'의 고통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 고통은 나의 경험과 상상에 제한된 상태로 머물게 된다.
최근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고 팟캐스트 멤버들과 대화를 나누며 나를 반성하게 됐다. 평소 공감이 중요하다 생각했고, 나는 다른 이의 고통에 공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멤버들과 대화를 하며 내가 오만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경험한 적이 없는 고통을 내가 경험한 고통으로만 생각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고통은 작아졌고, 해결되고 있는 문제로 머물렀던 것이다. 처음으로 '타자화'의 필요성을 느낀 순간이었다.
나는 안다, 가는 비 ......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게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버리는
가는 비 ...... 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 기형도, 가는 비 온다 中 -
물론 모든 인간의 삶은 자신을 중심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타자화'는 어렵다. 불가능할 수도 있다. 내로남불이란 말이 나온 것처럼, '나'의 일이 됐을 때와 '너'의 일이 됐을 때 우린 다르게 판단하고 행동한다. 하지만 노력은 해야 한다. 고통은 사람을 가려서 오지 않는다. 그리고 노력한다면 조금씩 '타자화'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타자화 역시 공감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고통받는 누군가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으니까. 다만,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나의 경험만을 기준으로, 나와 일체화해 누군가의 고통을 판단하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의 고통을 그 자체로 바라보려 노력한다면. 우리 사회가 조금은 더 밝아질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