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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민 Sep 20. 2019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 기다리는 이들을 위한 선물

잠깐 아침 산책을 다녀오려던 것뿐이었는데, 거의 2시간이 흘렀다. 숙소로 돌아가니 K는 외출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K는 마레지구에 한 번 더 다녀오고 싶다고 했다. 아무래도 그곳에 마음에 든 상점이 있는 모양이었다. K와 나는 각자 파리 여행을 마무리하고 다시 만나기로 했다.


아침 산책으로 꽤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 나는 호텔 방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짧고 굵은 휴식이었다. 마지막 날 파리에서 무얼 할까 고민하다가 나는 아직 풀지 못한 숙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바바파파’. 언니가 부탁한 바바파파 유아식기 대신 다른 장난감을 사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찝찝함이 남았다. 그래서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은, 기다리는 이들을 위한 쇼핑을 하기로 했다.


먼저 갓 태어난 조카와 시스터를 위한 바바파파 유아식기. 이미 한 번 바바파파 유아식기를 찾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약간 고민이 됐다. “다른 백화점에 간다고 한들 그게 있을까? 아니, 프랑스 국민 캐릭터라면서 언니가 잘못 안 거 아니야?” 이런 부정적인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찾아보기로 했다.


구글 맵에서 숙소와 가장 가까운 백화점을 찾았다. 아침 산책을 했던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이었다. 나는 아침 산책할 때 봐 둔 장난감 가게와 백화점 두 군데를 둘러보기로 했다. 두 군데나 더 찾아봤는데 없으면, 그건 없는 거다. 일단 뤽상부르크 공원 근처에 있는 장난감 가게를 찾았다. 아기자기하고 신박한 장난감들이 많았으나, 여기에도 역시 바바파파는 없었다.


그다음 목적지는 근처 백화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백화점 장난감 코너를 찾았다. 정말 많은 장난감들이 진열대에서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메인 진열대를 샅샅이 둘러봤다. 그런데 그 어디에도 바바파파는 없었다. “아무래도 바바파파는 나와 함께 갈 운명이 아닌가 봐” 생각하고 돌아서려는 차에 조그마한 간이 진열대에 있는 동글동글한 핑크색 캐릭터가 보였다. “바바파파다!” 이놈의 바바파파가 뭐길래 이런 감동을 주나. 나는 당장 언니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찾았어! 찾았다고! 여기 좀 봐!”


나는 소리쳤다.


언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쳐다가 보다가 이내 진열대에 전시되어 있는 바바파파를 발견했다.


“여기 식판이랑 물컵, 그릇 같은 게 있는데 뭐 사가면 돼?”


내가 물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시스터의 성격상 뭐라고 대답할지 뻔했다.


“전부 다. 그냥 다 사 오면 돼!”


나는 백화점 안에 있는 바바파파 제품을 종류별로 하나씩 담았다. 이제야 밀린 숙제를 마친 기분이었다.


시스터 말고도 한국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또 있었다. 내가 영국에서 어학연수를 할 때 같은 시기에 유럽에서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이수하고 있었던 친구 B다. B는 독일에서 어학연수 중이었다. 그는 종종 홀리데이를 맞이해 영국으로 나를 찾아오곤 했는데, 한 번은 내가 있던 맨체스터로, 한 번은 런던으로 왔었다. 나 역시 B가 있는 독일로 그녀를 만나러 갔었다. 5년 전, 파리에서 베를린으로 떠났던 것도 B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나와 첫 번째 파리 여행을 함께한 Y도 B와 절친한 사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 때문에 절친해진 사이. B가 나를 만나러 맨체스터에 왔을 때, 나는 아직 홈스테이를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P를 재워줄 곳이 없었다. 그때 Y가 선뜻 자기 방을 내어주었다. 처음 만나는 언니에게 자기 방을 셰어해 줄 만큼 Y는 착했다. 그날을 계기로 나와 Y, 그리고 B는 함께 여행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친해졌다.


내가 다시 파리를 간다고 하니 B는 나에게 군더더기 없는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


“맛 좋은 와인 한 병 사 와! 같이 먹게!”


나는 그녀에게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지만, 여행 마지막 날까지 그녀의 부탁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를 위한 와인을 사기 위해 Carrfour로 향했다. 파리 여행을 하면서 나는 거의 1일 1와인을 마셨다. 레드와인, 화이트 와인, 리슬링 등등. 종류별로 와인을 섭렵했다. 그렇지만 와인을 살 때면 늘 고민에 빠졌다. 종류가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일반 식료품점에도 와인의 종류가 많았는데, 대형 식료품점인 Carrfour에는 그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와인이 진열돼있었다. Carrfour를 두 바퀴 돌고, 와인 코너만 네 번 이상 둘러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와인을 사야 할지 감이 안 왔다. 이래 봬도, 나는 6개월 동안 국내 와인 수입업체의 홍보를 담당했던 사람이다. 열심히 와인 브랜드와 맛, 종류 등을 외웠었는데, 막상 와인의 종류가 이렇게 많으니 고를 수가 없었다.

나의 선택은 옳았다. 한국으로 돌아와 B와 함께 마신 이 와인은 인생와인이라고 할 만큼 맛있었다.

이럴 땐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믿어보는 수밖에 없다. 나는 매대에 진열된 수많은 와인 중 와인 평가에서 99.9점을 받았다는 와인 한 병을 골랐다. 처음 보는 와이너리의 화이트 와인이었다. 마셔보지 못한 것이라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이 정도 고민했으면 충분하다. B라면 프랑스산 와인이기만 하면 별다른 까탈을 부리지 않을 터였다.

 

여행 자금으로 환전해 온 유로가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동전을 탈탈 털어 편의점으로 향했다. 조리된 음식을 사 간단히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나는 아침에 먹을 과일과 요거트, 그리고 파스타 샐러드 등을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K는 아직 숙소에 오지 않았다. 나는 장 본 물건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짐 정리를 시작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때 늘 수화물 무게가 문제가 됐다. (뭘 그렇게 많이 산 것 같지도 않은데, 늘 수화물 규정 무게에 간당간당하게 채워갔다. 몇 번은 수화물 규정 무게를 초과해 공항 구석에서 짐을 다시 싸기도 했다.) 그래서 미리 짐을 싸두기로 했다. 블록 쌓기 하듯 캐리어 구석구석을 채웠다. 올 때 일부러 캐리어의 반을 비워온 게 도움이 됐다. 원래 가져온 짐과 쇼핑한 것들을 가방에 차곡차곡 채워 넣었더니 딱 가방이 알맞게 닫혔다.


나는 여행 키트에서 간이 저울을 꺼냈다. 그리고 캐리어에 저울 고리를 걸어 무게를 재 보았다.


20킬로 안쪽이었다. “흠, 이 정도면 훌륭해!”


조금 뒤 K가 돌아왔다. 양손에 편의점 봉투를 들고서. 여행 마지막 날 K와 내가 통한 모양이었다. 그녀도 외식하기엔 조금 부담스러워서 이것저것 먹을 것을 사 왔다고 했다. K와 내가 사 온 것을 합치니 풍성한 저녁이 됐다. 우리는 서로 사 온 물건들을 자랑하며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을 마무리했다.


드디어 파리를 떠나는 날이 됐다.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서야 했기에 K와 나는 지난밤 미리 짐을 싸 두었다. 새벽부터 울리는 요란한 알람 소리에 몸을 일으켜 나갈 준비를 했다.

헤어짐은 늘 아쉬운 법이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를 파리여, 안녕!

숙소에서 공항까지 우리는 픽업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회사에 미리 예약을 해둔 것이었는데, 그 덕분에 조금 더 수월하게 공항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픽업 택시 드라이버는 한국인이었다. 고향에서 온 여행자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넬 수도 있었지만, 그는 짤막한 인사만 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K와 나는 각자 창밖으로 파리 도심을 구경했다. 파리는 넓고, 우리가 가보지 못한 곳은 너무 많았다. 저 멀리 스쳐 지나가는 잔디로 뒤덮은 스타디움도,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 수 없는 오래된 건물들도 전부 처음 보는 곳들이었다. 오늘 떠나면 당분간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이기에 K와 나는 조용히 풍경들을 눈에 담았다. 그리움으로 남을 그 장소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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