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스에서 파리로 돌아온 다음, 나와 K는 여행다운 여행을 하지 못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나만 여행다운 여행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실제로 내가 호텔 방에 있는 동안 K는 부지런히 파리 곳곳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아쉽지 않았다. K가 돌아다녔던 곳은 5년 전에 내가 한 번쯤 갔을 법한 곳들이었으니깐.
다만, 내가 아쉬운 건 파리에서 보낼 시간이 오늘 단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열흘이 넘는 꽤 긴 여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행의 끝에 다다르니 우리의 여행이 짧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 날만큼은 부지런히 움직여 보기로 했다.
오전 8시 즈음, 거리로 나왔다. 오늘은 파리 5구를 좀 돌아볼 작정이었다. 반나절 쉬어서 그런지 유난히 컨디션이 좋았다. 아침 공기도 상쾌하고 몸도 가뿐했다. 나는 호텔에서 몽쥬 약국 방향으로 걸었다. 올해 초 부모님이 유럽 여행을 다녀오시면서 꼬달리 화장품을 선물로 사 오셨는데, 마침 그게 다 떨어졌다. 이참에 몽쥬 약국에서 잔뜩 사 가야지 싶었다.
호텔에서 약국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딱 기분 좋게 걸을 수 있는 거리였다. 찬 공기를 마시며 걷다 보니 커피 생각이 간절히 났다. 아직 주변 카페들은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시각이었다. 저 멀리 노란색 불빛이 보였다. 맥도날드다. 광화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나는 종종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있는 맥도날드를 이용했다. 아침이면 맥카페에서 큰 사이즈의 라떼를 주문해 회사로 들고 갔다. 맥카페는 가격 대비 가장 맛 좋은 커피였다.
달리 문 연 곳도 없고, 직장 생활하던 생각도 나서 맥도날드로 들어갔다. 이른 시간이라 매장 안에는 최소한의 직원만 있었다. 주문대에 서서 직원을 기다렸지만, 주방으로 들어간 직원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대신 옆에 키오스크가 보였다. 기계 주문만 가능한 곳 같았다. 하지만 불어로 쓰인 화면을 내가 이해할 리 없다. 나는 조심스레 직원을 불렀고, 커피를 주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직원은 나에게 유로를 받더니 코인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걸로 어쩌란 말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인을 받아 들고 난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그러자 직원은 저기 있는 커피 머신에 코인을 넣으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커피 머신 앞에 섰다. 두 번째 위기가 닥쳤다. 직원이 준 코인을 기계에 넣고 원하는 커피를 눌러야 하는데, 커피머신에도 온통 불어로 쓰인 글자뿐이었다. “그래서 아메리카노가 대체 뭔데?”
다시 직원에게 도움을 청할까 했지만, 직원은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 버린 지 오래였다. 나는 커피 머신 위에 종이컵을 올려놓고 대충 아무 버튼이나 눌렀다. 뭐든 나오겠지 싶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노즐을 따라 까만 아메리카노가 졸졸 흘러나왔다. 여기서 세 번째 위기가 발생했다. 컵을 가득 채우고도 커피가 계속 나오는 것이다. 버튼을 누를 때 용량을 잘못 선택한 모양이었다. 나는 컵 밖으로 줄줄 흐르는 커피를 보고만 있었다.
한참을 나오던 커피가 드디어 멈췄다. 나는 종이컵에 입술을 맞대고 한입 호로록 들이켰다. 이대로 컵 뚜껑을 닫았다간 또다시 커피가 흘러나올 게 분명했다. 그리곤 티슈를 뽑아 컵 주변을 닦았다. 다행히 종이컵이 두꺼워 컵이 흐물흐물해지진 않았다.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갑자기 너무 나 자신이 우스워 보였다. 평소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여행지니깐 이런 실수도 하는 거지 뭐!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나는 더 흥겨워졌다. 비록 커피를 얻기까지 세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오늘 날씨와 이 장소, 그리고 커피 한 잔은 찰떡궁합이었다.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몽쥬 약국에 도착했다. 몽쥬 약국은 이름 아침부터 문을 여는데, 다 한국인 관광객 때문인 것 같았다. 몽쥬 약국은 한국인이 파리 여행을 할 때 빼놓지 않고 들리는 곳이자, 패키지여행의 단골 코스였다. 그래서인지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약국 안은 패키지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여기저기서 한국어가 들려왔다. “가이드님, 이건 뭐야?” “누구야, 이 크림이 그렇게 좋대” “우리 딸이 이거 사다 달라고 하던데….” 등등. 몇 개월 전 우리 엄마도 여기 서서 가이드에게 저런 질문을 쏟아냈을 터였다. 나는 관광객들 틈을 비집고 크림 몇 개를 사서 나왔다. 더 있다가는 관광객들이 속사포로 쏟아내는 한국어에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나의 다음 행선지는 뤽상부르크 공원. 몽쥬 약국에서 도보로 약 10~15분 거리에 있는 곳이다. 뤽상부르크 공원은 튈르리 공원만큼이나 규모가 컸다. 공원 입구는 창살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난 공원 중심부까지는 차마 가지 못하고 입구에서 가까운 벤치에 앉았다. 귀에 이어폰을 끼고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커피를 마셨다. 그러다 문득 “아, 진짜 여행의 마지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쉬움이 남았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릴 순 없었다. 나는 그저 여행의 마지막 날인 오늘을, 후회 없이 충실히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공원에서 나와 나는 노트르담 대성당까지 걸었다. 아침 산책치고는 조금 긴 루트였지만, 노트르담 대성당을 지척에 두고 안 보고 지나칠 순 없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각도에 따라 모양이 다르게 보였다. 보통 노트르담 대성당을 가면 아름다운 건축양식과 웅장함에 반한다던데, 나는 그것보다 보는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건축양식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 모습이 마치 두 얼굴의 파리를 보는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