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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민 Sep 18. 2019

오늘은 쉽니다.

다음 날, 난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눈을 떴다. 윗옷을 들어 보니 알레르기도 전부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파리의 날씨는 여전히 우중충했다. 그래도 어제보다 덜 쌀쌀하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커피포트에 물을 끓였다. 우리는 차를 마시며 오늘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이미 주요 관광지는 다 돌았던 터라 난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K는 몽마르뜨 언덕에 가고 싶다고 했다. 몽마르뜨는 5년 전 내가 처음 파리에 왔을 때 처음 묵었던 동네였다. 그때도 난 몽마르뜨 언덕에 가지 않았다. 볼 것 없는 관광지라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다. 내 낌새를 눈치챘는지 K는 이미 여행 커뮤니티에서 몽마르뜨 언덕에 갔다가 근처 카페에서 차 한잔할 동행을 구했다고 했다. 나는 새삼 그녀의 배려가 고마웠다. 


우리는 숙소를 나서 갤러리아 라파예트 백화점으로 갔다. K는 부모님을 드릴 명품 지갑과 벨트를, 나는 언니가 신신당부한 유아용품을 사야 했다. 명품관을 돌며 나는 K가 선물 고르는 것을 도와줬다. 그리고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언니가 말한 유아용품을 찾았다. 먼저, 장난감 코너로 들어섰다. 얼마 전 첫째 아이를 출산한 언니는 프랑스 여행을 가는 나에게 다양한 육아용품을 사 올 것을 부탁했다.


 시스터의 쇼핑 리스트 중에서 무게가 무겁고 부피가 큰 물건들은 단칼에 거절하고, 육아용품 몇 가지만 사가기로 했다. (언니는 캐리어를 한가득 채우고도 모자랄 만큼 구매 리스트를 작성해 보냈었다.) 시스터는 조금 시무룩해 했지만, 때를 놓치면 이마저도 사 오지 않을 것 같았는지 해외직구를 해야 살 수 있는 유아식기와 장난감 등을 사진 찍어 보냈다. 


수많은 캐릭터 중에서 시스터는 ‘바바파파’를 사 오길 바랐다. 시스터에 따르면, 바바파파가 프랑스 국민 캐릭터라나 뭐라나…. 하지만 그 어디에서 바바파파를 찾을 수 없었다. 백화점 장난감 코너에서도, 토이저러스 같은 대형 장난감 가게에서도.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어 나는 장난감 코너에서 원목 교구를 하나 집었다. 자노드 서커스 스토리 세트였다. 아기자기한 장난감이 귀엽기도 했지만, 원목이어서 조카가 가지고 놀기도 안전할 것 같았다. 비록 시스터가 원하는 것을 찾진 못했지만, 마음의 짐이 한결 덜어졌다. 

자노드 서커스 세트는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 지금까지도 조카가 잘 가지고 노는 걸 보니


K와 나는 가족들의 선물을 산 다음, 백화점 식료품 코너로 내려갔다. 숙소 근처에 있는 식료품 가게도 물론 좋지만, 백화점 식료품 코너에는 일반 가게에서 볼 수 없는 식료품이 많았다. 프랑스의 유명 티와 쿠키, 초콜릿 그리고 각종 소스까지. 우리는 그중 특이하다 싶은 식료품을 몇 가지 사 들고 백화점을 나왔다.  


오늘 K와 내가 함께하는 일정은 여기까지였다. 백화점 앞에서 K와 나는 헤어졌고, K는 몽마르뜨 언덕으로 나는 마레지구로 향했다. 전시 마지막 날, 데이비드 호크니 전을 보기 위해서다. 마레지구로 가기 위해 메트로 역을 찾았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한 사람만 겨우 쓸 수 있는 조그마한 내 접이식 우산은 세찬 비바람을 견뎌내지 못했다. 이미 내 옷은 물바가지를 뒤집어쓴 것처럼 쫄딱 젖었다. 잠시 쉬어갈 곳이 필요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카페엔 비를 피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북적북적 거리는 사람들 틈에 내 자리는 없어 보였다. 나는 세찬 비바람을 뚫고 조금 더 걸었다. 그리고 손님이라곤 없는 한적한 일식당을 발견했다. “여기서 잠깐 쉬어가야겠어.”


마침 아직 점심을 먹지 못한 터였다. 나는 스시 몇 조각이 포함되어 있는 정식을 시켰다. 파리에서 먹는 일식이 얼마나 제대로 된 것이겠느냐 만은…. 이건 좀 너무했다. 일식 레스토랑은 중국인이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내온 음식은 일식도 중식도 아닌 애매모호한 것이었다. 그나마 따뜻한 미소국은 먹을만했다. 나는 잘 넘어가지 않는 스시를 입에 욱여넣고 미소국을 마셔 오물오물 삼켜버렸다.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말인즉, 중국인 주인장이 운영하는 이 일식집에 조금 더 머물러야 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일식집에서 가장 일본스러운 음식은 일본산 캔 맥주뿐이었다.) 천천히 맥주를 마시면서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몽마르뜨로 향하고 있을 K가 조금 걱정됐다. 하지만 잘 가고 있으리….


빗줄기가 조금 약해졌다. 다음 장소로 향하기 위해 나는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비에 쫄딱 젖어 찢어지기 일보 직전인 종이 쇼핑백, 그리고 축축한 옷가지들. 이대로 호크니 전시를 보러 간다면, 도로에서 쇼핑백이 찢어질 게 분명했다. 또 걸을 때마다 물이 찍찍 새어 나오는 신발도 신경 쓰였다. 전시장 안에 들어가면 눈치 없는 내 신발이 전시장 여기저기에 촉촉한 발 도장을 남길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했다. 그래서 난 다음 일정을 포기했다. 그리고 홈, 스위트 홈으로 돌아갔다.


문 닫은 상점 주인처럼,

“오늘 오후는 쉽니다”를 중얼거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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